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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예약을 해서 급하게 김유정역으로 왔는데, 사람 진짜~ 많다.

탑승과 운행에 관련해서 설명을 하는데, 잘 들리지도 않고,

여하튼 설명하는데 10분 이상 걸린듯.

 

4인승이 먼저 출발- 4인승 VR- 2인승 - 2인승 VR출발한다.

우리가 서 있던 줄이 먼저 탑승할 줄이야~~

 

탑승하고 출발~ 오리배처럼 힘들줄 알았는데, 내리막도 있어서

생각보다 많이 힘들지는 않았는데,

 

뒤에서 자꾸 붙어서 오니~ 그럴 때마다 패달을 열심히 밟아서... 힘들었다.

 

힘들게 밟아도 밟은 만큼 앞으로 나가는 것 같지도 않고.

 

 

 

 

풍경구경하며 천천히 가고 싶었건만

 

뒤에서 얼마나 바짝 붙는지....

 

이리 좋은 풍경을~~

 

 

 

 

전투적으로 지나갔다.

 

 

 

 

 

 

 

 

 

 

 

 

 

 

그러고 나면 낭만열차를 타고 강촌 흔들다리로 가야해서 휴게실에 서면 끝이다.

 

내리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걷는 자세가 영 이상하다.

 

휴게실 모양이 나무다.

 

 

휴게실에서 보이는 풍경도 진짜~ 좋다.

 

 

 

 

 

폭포도 있다. 처음에 은정이가 폭포있다기에 무시했구만

진짜 폭포였다. 위에는 안 보고 밑에만 봐서 수돗물 터져서 물이 쏟아지는 줄 알았는데

 

폭포쪽에 단풍도 너무 예쁘다.

 

 

 

휴게실서 구경하던 은정이가 시계하나씩 사서 하잖다.

그래서 시계를 보니 모양도 예쁘고 마음에 드는데, \38,000한다.

아~~하고 있는데 은정이가 집어든 시계는 모형시계였다.

 

 

 

낭만열차 왔다.

 

 

 

옛날 강촌역에 내려 걸어서 흔들다리로 갔다. 그곳에 셔틀버스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셔틀버스를 타고 김유정역으로 왔는데,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냥 강촌역에 차를 두고 흔들다리서 셔틀버스타고

김유정역에 와서 레이바이크를 탔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 텐데

 

여하튼 김유정역에 와서 짚라인 한번 타고 싶어 탔는데,

왔다갔다. 5분이면 충분하다. 정말 짧고, 구경할 것도 없었다.

 

미경이가 사진 찍고는 블로그에 포스팅하란다.

내 사진은 안 한다고 하니 전혀 안 보인다며 동영상도 올리라고 한다.

오냐~~ 내가 니 성의를 봐서라도 올려주마!!!

 

 

 

그리고 마트서 바베큐할 고기랑 다른 먹거리 사고 숙소로 왔다.

숙소는 하얀허브펜션의 스피아민트 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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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있는 미경이 만나는데, 서울은 답답하다고 서울 외곽으로 나가자고 했더니

서울서 지하철 타고 갈 수 있는 강촌역을 말해서 좋다고 했는데, 강원도일 줄이야

 

대구에서 같이 올라가는 은정이가 차를 갖고 간다기에 같이 출발하는데, 그때 네비에

입력하면서 강원도인줄 알았음....헐....

 

아침에 7시에 대구에서 출발해 4시간 정도 걸렸다. 휴게소에 3군데를 들러서 그렇지 조금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고...

 

근데 미경이가 늦다. 12시 조금 넘어 도착한다고

 

1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서 은정이랑 강촌역 근처 구경 좀 하고도 시간이 남아

구곡폭포로 차를 갖고 가는데, 입장료가 있다. 미경이오면 다시 올꺼라 그냥 나오고

흔들다리로 갔다.

 

 

풍경이 너무 좋다.

 

물이 얕아서 아쉬웠지만 맑고~

 

사람이 없는 흔들다리 둘이서 걸으니 괜찮기는 했다.

 

약간씩 흔들리는 것이 견딜만 했다.

 

징검다리도 만들어 놓고

 

물이 깊지 않으니 아이들하고 놀기에도 좋겠다.

 

어찌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지만 친구와 같이 있으니 더 좋다.

 

 

흔들다리서 날라다니는 잠자리, 물에 있는 송사리 보다가 미경이 올시간이 되었다.

다시 강촌역으로 가서 미경이 태워서 블로그에 있는 닭갈비 식당으로 갔다.

 

근데,,, 많이 짜다. 밥 2개 볶고는 못 먹어 싸왔다. 저녁에 먹게...

 

레일바이크 3시에 예약되어 있어서 급하게 구곡폭포로 움직였다.

우선 주차한다고 주차비 \2,000내고,

구곡폭포 가는 입장권 사고

 

가는 길도 너무 좋다. 강원도라 그런지 단풍이 빨리 들어서...

 

천천히 구경하면 걸어도 땀이 난다.

 

 

 

폭포를 보기위해 올라가야하는 계단. 하지만 많이 길진 않다.

 

수량이 적어서 그렇지 폭포 길이도 길고~ 나는 좋았다. 수량이 많았다면 정말 좋았을 듯

 

 

 

 

 

 

 

 

 

차로 도착해 1시간 정도 밖에 못 있고 바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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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하중도에 처음 가보고 너무 좋다고~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난 뚜버기, 운전면허증도 없어요)

이모한테 이야기 했더니, 올해 또 갈껀데 같이 가자고 한다. ㅋㅋ

난 너무 좋지

 

 

장년보다 주차시설도 더 잘 해 놓고,,, 주차하자마자 중국집에서 배달와서 음식 먹는 사람도 봤다.

 

 

아직 갈대가 제대로 피지를 않았는지. 갈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코스모스도 마찬가지.... 조금 일찍 왔다보다 장년엔 늦게 왔었는데, 힝

 

 

다음주엔 한창 좋을려나~~ 하지만 다음주엔 외가집에 결혼식이 있어 우리 모두 오기 힘들다.

 

 

오늘 햇빛이 좀 강하네... 선글라스 이럴때 쓰면 참 좋은데, 당연히 안 챙겼고,

큰 맘 먹고 큰 돈 주고 산 부채는.... 여름 지나갔다고 고이 모셔 놔서 안 갖고 왔다.

아~~ 둘 다 아시버....

 

↑이꽃은 갈대단지, 코스모스단지 사이에  이 꽃으로만 따로 단지를 만들어 놨던데,

이름을 모르겠다. 이모한테 물어보니 아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간간히 코스모스 좀 피었는데, 장년에 키가 커서 완전 우거졌던데, 오늘은 아니네

허리정도 밖에 안 온다.

 

 

듬성듬성 피어 있는 코스모스들~ 안타깝다.

 

박, 호박, 수세미 등으로 만들어 놓은 터널~이모는 주렁주렁 매달린 박을 보며

하나 갖고 가고 싶다고...난 호박! 호박죽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난 호박이 있어도 죽을 만들줄 모르는 요리 무식자!!!

 

 

 

 

 

 

 

 

 

 

 

 

 

 

붉은 색 코스모스는 쉑시 하더만, 이렇게 흰색 코스모스는 또 청순하네.

 

 

 

이건 주차장에 있는 화분에 있는 꽃들

 

 

 

 

장년에 하중도는 늦게 와서 조금 아쉽더니 올해의 하중도는 너무 빨리 와서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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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 제대로 여행을 못갔다. 휴가 내내 옷만 만든다고 방콕했지...

그런 내가 안타까운지 이모가 어디든 가자고 한다.

요즘 나는 강천산이 너무 가고 싶은데, 멀다.

 

 

그래서 가까우면서 실용적인 곳 온천을 가자고 해서 오전 9시에 집을 나섰다.

거창에 유명한 온천이란다. 갔는데,

오늘 날씨가 선선한 바람이 부는게, 너무 좋은데 더 좋은건 실외 온천탕이 있다는 거다

사실 답답해서 찜질방에 가는 거 안 좋아하는데,

물 밖은 시원하고 물 안은 따뜻한 것이 너무 좋다.

그래서 때 밀 생각 없이 그냥 실외 온천탕에서만 50분 가량 있었다.

그런데.... 때밀고온 이모와 사촌동생이 볼일 끝났으니 가잖다.

힝~~ 난 너무 좋은데,,,,

 

 

나와서 점심 먹고도 2시쯤 밖에 안됐다. 그러니 딴 곳을 가잖다.

그럴꺼면 그냥 계속 온천이나 하자니까!!! 이 사람들이..

점심먹은 식당에 갈만한 곳을 물어보니 해인사 가란다.

속으로 '난 좋아' 하는데, 이모가 별로인가보다.

 

성주 한개마을과 세종대왕자태실을 가자고 한다.

 

 

그래서 움직였는데, 온천에서는 그렇게 좋던 날씨가 왜케 더운지, 그리고

한개마을... 그늘이 없어서 너무 힘들다.

그 와중에 짚공예 한다기에 거기 가서 사촌동생 가방 하나 만들어서 그냥 나왔다.

차안의 에어콘이 이리 좋을 줄이야

 

 

온천은 온천이라 못 찍고, 한개마을은 너무 더워서 양산 받치고 있느라 사진찍을 손이 없었고

 

세종대왕자태실 와서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모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 여기로 소풍을 왔었단다.

 

즉, 외가집과 가깝다는 건데, 나는 얼마나 가까운 건지 감이 안온다.

 

 

이미 한개마을에서 지쳐서 여기 겨우 올라왔다. 별로 높지 않고 그나마

소나무가 우거져서 그늘진 곳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미 한계다. 정말 대충 사진만 찍고 나왔다.

 

 

그냥 아는 역사에서 대충 끼워 맞춰가며 혼자 이해하고 말았다.

 

 

내려오는데, 바람이 너무 좋다.

여기 명당이라서 태실을 만들었다는데,

진짜 명당 맞는 듯.

 

풍경도 짱~ 나무 그늘도 짱!

 

 

태실은 사진만 찍고 나와서는 이렇게 풍경 사진찍으며 나무 사이에 부는 바람이

좋아서 그냥 않아 시간 때우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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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과 급 만남에 저녁을 너무 거~~하게 먹었더니

도저히 배가 불러서 차를 못 마시겠다.

그래서 가까운 청라언덕으로 가기로 했는데,

 

그냥 소화시킬 목적으로 갔는데, 오~~ 생각보다 야경이 너무 좋다.

 

그래서 급 기분이 좋아져서 여기저기 사진을 막 찍었다.

 

 

 

핸드폰도 새로 구매했겠다. 카메라 테스트 제대로 해본다.

야경도 생각보다 잘 나오고

 

 

 

그냥 야경이 좋아서 막 찍었는데, 어디가 어딘지 이게 어떤 건물인지 도통 모르겠다.

 

 

조만간 토요일과 일요일에 야경축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난 이렇게 미리 구경했네~~

 

 

핸드폰 새로 샀다며 사진을 막 찍는 나에게 친구 왈

"사진 너무 못 찍는거 아니니?"

"......"

"인정!"

 

 

역시 장비의 문제가 아니였어... 내 손과 나의 미적 감각이 문제 였던게야...

 

 

그래도 간만에 야경이 너무 좋아 블로그 올리겠다며 막~~~~찍은

사진들!

 

 

난 언제나 의욕만 넘치지 하지만 정말 야경은 끝내줬음!!!!

 

 

난 청라언덕 야경이 이리 좋은 줄 처음 알았음...

아니~ 이렇게 운영하는지 조차 몰랐음....

 

 

낮보다 야경이 더 좋은 듯!!!! 특히 여름에 덜 덥고, 이날은 유달리 바람도 많이 불어서

 

 

실컷 구경하며 사진찍다보니 서문시장 왔음

서문시장 주로 원단사러 와서 날 밝을 때만 오다가 야시장은 구경할 생각 안했음!

낮에도 지겹게 오는데 굳이 밤에까지 와야하나 싶어서

 

 

처음으로 가본 서문시장 야시장... 사진이 없다.!

왜? 난 별로 였으니까

먹는거 밖에 없는데, 이미 배가 너무 불러서 음식 냄새도 힘들었고

음식만든다고 연기에 버스킹하는데, 마이크 너무 크다. 귀 아프고...

 

짜게 먹어서 그냥 음료수 사서 먹으며 집에는 걸어서 왔는데,

집에 오는 길에 바람 더 많이 불어서

 

또 오는 내내 기분 좋았다.

 

한동안 너무 덥기만 했는데, 오늘 날씨 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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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연휴라고 오랜만에 온 서울~~

 

은정이랑 미경이랑 셋이 만나는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일하고 온 은정이 시간에 맞춰서 4시에 서울역에서 만나 바로 청계천으로 

 

석가탄신일은 지났지만 그래도 연등회는 한다기에 광화문에 내려 청계천 걷기시작!!

 

 

 

<청계천에 이렇게 큰 물고기가 있는 줄 몰랐다.>

 

 

나 혼자 신났다. 둘은 힘들어 하고, 결국 새벽다리에서 올라와 배고프다고 광장시장으로 갔다.

 

사람이 너무 많다. 앉을 자리 찾다가 지쳤다.

 

유명한 집따위 필요없다. 그냥 앉을 자리만 있으면 앉아서 먹는거다.

 

그래서 사진이 없다. 너무 힘들기도 하고, 사람이 많아서 가방을 안고 먹어야해서

사진찍을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난 항상 먹는 것만 보면 사진찍는 걸 까먹는데

 

같이 있는 친구들도 음식사진 찍는 취미는 없는 듯.

 

셋 중에 하나는 있을만 한데, 아무도 사진을 찍지 않았다.

 

우린 그냥 빈자리에 앉아 빈대떡과 파전, 맥주를 시켜 먹었다. 금액은 \29,000원

 

조금 남은건 포장해 달라고 해서 갖고 나오면서,

 

마약김밥도 포장해서 다시 청계천으로~~

 

 

다시 왔던 길로 올라가는데,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연등회가 빛을 발한다.

 

 

 

분수 쇼~도 한다.

 

 

 

 

 

 

 

 

 

 

 

 

 

 

 

광화문역이 가까워지니 사람이 진~짜 많다.

 

 

 

 

 

 

 

 

 

 

 

 

 

 

 

 

 

 

청계천만 보고 오늘 일정은 끝났다.

 

3일 일정중에 1일차- 오늘 청계천 연등회밖에 포스팅 할게 없다.

 

2일차-대학로가서 신선식탁가서 샌드위치와 샐러드 먹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보고,

 

대학로에서 쌀국수 먹고,,,---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김

 

소고기 못먹는데, 아무생각 없이 시켜서 결국 소고기가 절반인 음식이 나오고,

아깝다고 꾸역꾸역 먹었더니, 속이 안좋다.

 

여기까지도 괜찮다. 문제는 목이 붉게 달아 오르더니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시작

여의도 야시장 보기로 해서 이동을 하는데, 점점 심해진다.

 

결국 여의나루역에 내려 야시장까지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집으로 되돌아 왔다.

지하철에서 더 심해지니  친구들이 각자 핸드폰으로 응급실 찾아보기 시작했다.

 

셋다 멘붕 상태다. 지하철 이동시간이 길다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친구집에 가는데, 다행히 약국이 있어서 약을 사서 집에 도착해

통닭 시켜서 늦은 저녁먹고, 그냥 쉬었다.

 

3일차----미세먼지 엄~~~청 나서 외출하는 거 포기하고 그냥 친구집에 있다가 서울역서 KTX타고 대구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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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더럽게도 추운날 그것도 서울에서 결혼하는 내 친구덕에 전날에 올라와서

서울구경할려고 했더니 얼어죽겠다.

 

겨울에 결혼하니 할인이 많이 된다며 겨울에 결혼하는거 괜찮다고 하던.. 김경숙...

그딴 소리 한번만 더 하면 너 내손에... 죽..느..

최고온도가 -4도. 체감온도는 당연히 더 낮겠지...

내일 니 결혼식날 최고 온도가 -8도다.. 인간아

 

 

서울역에 내려 숙소에 짐 맡기고 버스 환승해 광장시장에 내렸다.동대문종합시장과 가까운 곳에 내렸는데,

내린김에 구경한다고 광장시장 보니 먹거리 골목... 배고프다.

 

그래서 바로 동대문종합시장가서 우선 밥부터 먹고, (생선구이 골목에서 한번 봤던 송정식당에 갔다.)

여행블로그에 남길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사진이 없다.

우선 너무 추웠는데다가 동대문종합시장에서 그냥 와펜과 걸고리 단추종류 사고 나머진 그냥 구경이었고, 저녁엔 프랑켄슈타인 공연 정도로만 생각해서 미쳐 블로그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동대문종합시장 냥 막 돌아다녔다. 우선 고리단추종류보니 서문시장이랑 같은 것만 있고,

심지어 가격도 같다... 헐~~~

 

포기하고 와펜을 보니 분명 종류는 많은데, 내가 원하는게 없다.

근데, 블로그에 평화시장에 마크가게에 있다기에 바로 건너편에 있는거 보고 온 지라 나와서 평화시장가서 마크가게가니 영~~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없다. 포기하고 돌아다니다.

 

같이 온 동생 보예가 장갑이 없어서 손 시리다고 해서 장갑사야겠다고 해서 장갑을 보니 나도 맘에 들어서 같이 샀다. --- 오후에 산 장갑 저녁에 공연보기 전에 잃어버렸단다. 이보예 진짜

 

그리고 워머가 3천원한다. 그래서 그냥 샀다. 색깔도 연한회색밖에 없다.

요즘 만들꺼 중에 워머 있었는데, 훨씬 싸니 사는게 맞지...

 

그리고 나와서 북촌으로 가기위해 동대문으로 걸어가는데, 성곽이 있다..

분명 내가 동대문종합시장 왔었는데, 그땐 동대문도 성곽도 내눈에 안 보였다.

여유가 있으니 이런것도 보이는구나

 

그리고 생각나서 찍은 성곽...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뭐... 기억한게 웬거냐...

 

 

 

이건 성곽이 서서 평화시장 찍은거 역광이라 안보여서 그냥 대충찍었더니 글자가 가렸네..

 

 

성곽은 더 볼 것도 없고 북촌으로 이동해야해서 바로 내려와 버스 타고 내려서 걸어오는데,

이보예 직장동료 만났다. 헐~~ 둘 다 대구서 직장다니는데, 둘 다 서울 놀러와서 만나다니... 뭐지??

난 같은 대구 살면서도 가다가 아는 사람 만나는 경우 잘 없는데, 내가 이상한가??

 

그 친구는 북촌구경하고 동대문시장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고 우린 거기서 오는 길이라 하고 헤어져

북촌 여행책자 받아서 걷기 시작~~!

 

여기가 북촌 1경 정면에 보이는 곳이 창덕궁이다.

 

 

 

여기가 2경이라는데, 뭐.. 별거 없구만...그래서 코스별로 가되 사진은 내가 찍고 싶은것만 찍기 시작했다.

 

 

나무문에 빨간 우편함이 괜찮아 보여서 찍었다.

 

 

여긴 한옥이 모인 골목...북촌이라고 전부다 한옥이 아니다.  이런 곳이 많이 없다.

 

 

여기도 역광 중국인들이 대부분이다. 추운데도 여기까지 관광온 당신... 대단해요

 

문 옆에 작은 문이 귀여워 찍었는데, 옆에서 보예가 하는 말

"집은 한옥인데, 다~~~도어락이 달려 있네요..."---초치지말자 우리.. 보예야

 

 

핸드폰 배터리 다되어 교체하면서 한참을 서 있다가 test로 찍은 사진

 

 

확실히 사진으로 다 못 담는게 있다. 정면에 보이는 산이 너무 예뻐서 시린손 꺼내서 사진찍었건만...

전선에 가리네... 이사진에서 주인공은 너다. 전선....

 

 

 여기도 그냥 골목 전망대있다기에 걸어다가다 찍은 사진

 

 

그냥 막 찍어도 사진이 예쁜가 싶어서 찍었는데, 그냥 막 사진이다.

 

이것도 해가 뉘엇지는 산이 예뻐서 찍었건만... 나무가 주인공 돼쓰

 

줌 땡겨도 나무가 주인공 돼쓰

 

 

여기 코리아 목욕탕이 있는 골목. 위에서 찍으니 예쁘네,

 

 

하나의 돌을 다듬어 만든 돌계단이라기에 암만 찾아도 없길래 그냥 내려와 걷다보니 보여서 올라갔다.

 

 

돌계단 팻말을 보고도 못 찾은게 화나서 끝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못 본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가려져 있으니 못 봤지.

 

제대로 가까이 와야 보인다. 그러니 그냥 지나쳤지...쯧쯧

 

 

 

다시 내려오면서 찍은 돌계단.

추운날 북촌을 다 돌아다녔는데도 1시간이 남는다. 6시에 북촌을 나와 충무아트홀 근처에서 저녁먹을 예정인다.

결국 1시간 동안 쇼핑했다. 70%할인한다는 액세서리 가게에서 둘이 폭풍 돈 지름을 하고 나와서 너무 추워 라떼 한잔씩 하고 겨우 시간 때워서 지하철 타고 충무아트홀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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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에서 수제비 먹고 있는데, 여기 조야동 하중도 코스모스 보고 왔다고 사진찍은거 보여주는 이모...

잉~~가고싶잖아!!!

 

근데, 가볼까?? 하는 이모 "응~~~~가자 나 데리고 가줘^^"

 

그렇게왔는데, 하늘은 어둡고, 바람 불어 춥고,

 

 

하지만 코스모스는 너무 이쁘고 많고, 놀랐다. 대구에 이런 곳이 있다니...

 

 

저기 보이는 다리 지상철 3호선이 다니는 팔달교다...

 

 

색깔도 다양하고, 진짜 이쁘다.. 그래서 나 데려와서 고맙다고 했다. 진짜 고맙다는 말이 그냥 나올 정도로 난 좋았다. 추운것만 빼고, 난 추위에 약간 사람이라고...

 

 

여긴 팔달교 반대쪽 노곡교....

즉.하중도는 팔달교와 노곡교 사이에 있는데, 노곡교와 더 가깝다.

 

 

바람에 날리면 날리는 대로 그냥 찍었다. 바람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것이 아니기에...

 

 

꼭 비올것 같은 하늘... 진짜 비왔다.

 

 

색깔이 특이하고 이뻐서 잡고 찍었다.

 

 

완전 찐~~한 색의 코스모스 신기했다.

 

 

 

팔달교 쪽으로 걸어가면 이렇게 갈대밭까지... 코스모스와 갈대를 같이 볼 수 있는곳...

갈대의 흰색 부분을 손으로 만지니 부드럽다.

 

 

이건 일부러 만들려면 힘들지 않을까?? 자연은 대단해~

 

 

코스모스가 많은 곳에서는 이름 모를 꽃이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내 키보다도 큰 코스모스가 진짜 많다. 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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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입구사진이 없어서 3월28일 갔음에도 지금껏 포스팅을 못했다.

 

사진을 안 찍은 이유는 솔직히 이렇게 잘 되어 있을지 몰라서 처음부터 사진찍을 생각이 없었는데,

안에 들어가서 보니 장난아니게 꾸며놨고, 게다가 무료라니...

 

 

처음 입장해서 그냥 대충 볼려고 했는데, 도저히 사진을 안찍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서야 핸드폰꺼내 들고 사진을 찍으니 같이 갔던 친구가 본인 사진을 찍어달란다.... 미란아~~난 인물사진은 안찍는다. 미안하다

그래도 넌 예쁘니까 찍어줄게...하고 찍고선 바로 사진보내주고 삭제...

 

 

 

 

 

 

 

 

이건 영상물인데, 대화내용도 나오고 인물들이 일어났다. 앉았다 하더라

 

 

 

 

 

 

 

 

 

 

 

 

 

 

 

 

 

글쎄... 무슨말이 필요하리오... 그냥 가서 보시오... 어린아이들 데리고 온 부모도 많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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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그냥 가자는대로 왔는데, 그래도 처음 일정에서 바뀌지 않고 온건 다행이다 싶다.

주차장에 안내도가 있는데, 넓다...

 

 

 

티켓부터 사고 입장

 

 

 

들어서자마자 말이 끄는 마차가 있다. 가족 4인 기준에 1만원이란다..사실 주차장에서 본 안내도를 보고 넓다고 생각했기에 싸다 싶어 그대로 탔다. 아저씨가 설명을 참 재밌게 한다. 그래도 구경하면서 설명듣는데, 설명이 빨라서 따라 갈수가없다.

여하튼 아저씨가 한 말중에 여기서 찍은 영화를 자기도 모른다는 거다. 왜 그러냐면, 외우면 또 찍고 외우면 또 찍어서 포기했다고, 그만큼 여기에서 많은 작품들이 촬영된다는 말이겠지

 

 

 

마차에서 내리고 보니 요녀석 참!! 착하다. 말도 잘듣고, 포즈도 취할줄 알고, 기특해서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다들 '아이고 똑똑하다~' 한다.

 

 

 

들어서면 이렇게 전차부터 보인다. 그리고 운영도 한단다. 무료로.. 다만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우리가 점심시간 조금 전에 도착했는데, 오전꺼 끝나고 2:30이 있다. 설마 우리가 그 시간까지 있겠냐? 그냥 포기하자!!!

 

 

 

나~~~~ 여기 안다.... 경성스캔들에서 나온곳이다.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에서 여기가 몇번나왔지~~ 오 신기해

 

 

여기도 경성스캔들에서 기방으로 나왔던 곳이다. 우와~~~

 

 

조선시대 건물도 있고, 일본식의 건물에 총독부건물 최초 호텔과 백화점, 원구단.극장에 클럽까지.. 우와 진짜 신기하다.

 

 

 여긴 총독부 건물로 각시탈에 자주 나오는 곳이지... 신기방기

 

 

 

 

여긴 경성역!!!

 

 

 

 

 원구단

 

 

극장

 

 

 

 

 

 

 

분수 뒤에 문이 있어서 들어가봤더니 별거 없더라는....

 

 

각 작품마다 주연배우들의 손도장도 있다. 이건 포화속으로

 

 

전우치와 모던보이

 

 

에덴의 동쪽

 

 

 

경성역과 항상 같이 나오는 기차~~실제로를 경성역과는 좀 떨어져 있다는...

 

 

여긴 60 70년 시대의 서울

 

 

 

 

 

구경다 하고 나니 2:10이다. 이모에게 말해서 그냥 전차 타고 나가기로 결정... 그래서 기다렸다가 탔다. 무지 짧은 거리를 가는데, 속도도 무지 느리지만 진짜 신기했다. 지나갈때마다 이걸 타는 우리를 부러운 눈으로 본다. 아마 돈 내고 타는 걸로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닌 줄 알았던 어린남자애 아버지!!! 아들안고 뛰어서 뒷문으로 탔다는... 느려서 가능한데... 다른사람들도 타지... 잼있는데,,,ㅋㅋ

 

우리를 찍는 사람들을 보며서 드는 생각 내려서 전자 움직이는것도 찍어야하는데,,,,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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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부터 화려하다. 역시 유명한 곳인지 사람들도 많고, 여기저기 사진찍는다고 다들 셔트 누르고 있다.

우리도 얼른 차에서 내리니 햇볕이 강렬해 모자와 양산을 꺼내서 쓰는데,,, 사진찍을려니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결국 그냥 사진만 찍는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제대로 찍기가 힘들다.

 

심지어 자기 사진찍고 그자라에서 사진 확인한다고 뒷사람은 생각도 안하고 시간 죽이기를 하고 있질 않나...

그래서 조금 지나니 다들 사진찍는게 시큰둥하다. 아침을 굴정식으로 먹었는데, 정말 맛이 없어서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빼대기죽은 먹어야 된다고 4명이 2그릇만 시켰는데,,, 더 시키면 어쩔뻔 했니... 이것도 별로

 

그리곤 더 사진찍을 생각이 없어진다.

 

 

 

 

 

 

 

 

 

 

여긴 딱 봐도 알겠다. 착한남자 마지막회에 나오는 곳!!!! 친구가 이 사진 보여줬을때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내가 찍어서 느낀 점은.. 음!! 이곳이 통영의 동피랑마을이구나... 즉! 통영까지 온 내가 대단하다라는 것만 느껴진다. 왜냐~~송중기가 지금 여기 없기때문에!!!!!

 

 

동피랑마을이 높은데 있는건 주위를 보면 안다. 게다가 바다가 바로 옆에 있다... 사실 내가 운전을 안하니... 바다가 가까이 있어도 못느낀다. 라기보다 관심이 없는거겠지?? 정신이 없기도 하지 계속 차안에서 이동한다고 나도 힘들었다고~~

 

여하튼 사진찍는데, 이상한게 있어서 줌으로 땡겼더니 거북선이 보인다. 이모에게 말하니 진짜다.... 그래서 동네 할머니한테 물어보니 입장료있단다. 그래도 가보자고 해서 가봤더니 별 다를게 없어 보인다.

 

 

 

 

5년전쯤에 와본 사촌언니가 많이 바뀌었다 해도 나야 안와봤으니 모르지 했는데, 겨울왕국보니 최근에 그려진 건줄은 알겠다. 안되어도 올 초에는 그렸다는 말이겠지

여기서 많이 정체가 되었다. 여전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아이들이 엘사 그리고 안나와 사진찍겠다고...

 

 

 

 

 

이 배 그림 바로 밑에 있는 날개 그림에 다들 등대고 사진찍는다고 또 정체현상... 사촌언니가 더 가야 있었는데, 이것도 바뀌었다고 했는데, 사실 차타고 이동하니 원래 자리에도 있다. 근데,, 다들 또 귀찮다고 패스....난 찍고싶었다고엉엉 동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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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을 보기위해 이동하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가 표시되어 있는거 보고 또 즉흥적으로 움직인다... 난 그런거 관심없는데,,, 가 봤더니 의외로 잘 해놓기는 했다. 생가 옆에 기록 전시관에 대통령 출마 당시의 전단지들도 있고, 옛날로 돌아간 기분... 

 

다들 사진찍는다고 정신이 없는데, 난 그다지 찍을 만한게 없어서 안찍었다. 내 사진은 몇개 있지만 워낙 얼굴팔리는 것을 싫어하는 지라 패스~~

 

그리고 그 앞에서 쥐표샀다. 저녁에 맥주 안주로 먹는다고.^^

 

 

 

그리고 바람의 언덕에 도착!!!

오~~ 진짜 바람이 엄청 부는 것이 좋기는 한데, 땀을 흘린 상태에서 바람을 맞으니 끈적끈적해 졌다.

 

여긴 계단 올라가면서 찍은 사진

 

 

비가 왔다갔다 하더니 전체적으로 좀 흐리긴 해도 바다는 바다다.... 좋아신남 동글이

 

 

 

이게 제일 유명하겠지.... 오~~ 그러고 보니 아는 사람도 같이 찍혀있네... ㅋㅋ

 

 

그리곤 또 바다 사진~~ 난 바다가 좋아... 멀리서 보는 바다가꿈뻑꿈뻑 가까이서는 비린내도 그렇고,,, 무서버서

그래도 한 여름에 해수욕장 갈일 있음 고민안하고 가겠지.... 그냥 바다보러....

 

 

 

이 언덕까지는 귀찮다고 안가겠다고 우기는 이모와 사촌동생... 또 귀차니즘 발동했구나,,, 그래도 다들 여기로 가니 안 갈수는 없는지 따라 나선다.... 그럴꺼 그냥 가지... 인상쓰게 만들고....음흉 파란동글이

 

 

이제 저녁이라 해지는 모습도 좋다.... 그래서 또 찍어봤는데.. 역시 사진의 한계... 그 벅찬 마음을 담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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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에 도착해 갈만한 곳을 찾는다. 처음부터 즉흥적인 여행이라. 통영가기위해 출발했는데, 부산으로 가질 않나... 그러니 계획을 가면서 잡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바람의 언덕을 가는 길이었으나 거제를 찾으니 포로수용소가 나왔고, 사촌동생의 적극적인 건의에 가기로 했는데, 바람의 언덕을 먼저 갔다가는 포로수용소가 끝나는 시간이라 급하게 도착.

 

6시까지 하는데, 5시에 도착했다. 입장료가 어른 4,500원이기에 비싸다 싶었는데,,, 헐~~ 이렇게 넓을 줄이야.

시간은 없고, 정말 뛰다시피해서 구경을 했다. 우선 결론을 말하자면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다. 예정없이 왔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니고 계획을 하고 왔더라도 이곳의 나의 의견을 빠졌을테니... 원래 이렇게 슬픈 역사는 좋아하질 않아서...

 

 

설치배경(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거제도를 포로수용소 적합 지역으로 판단한 이유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2년 6월 9일에 열린 미 하원의 청문회이다. 이 청문회는 포로수용소장 돗드장군의 피랍사건과 관련하여 거제도 포로수용문제 전반에 걸친 사실 확인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은 육군성장관(Secretary of the Army) 페이스(Hon. Frank Pace, Jr.)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Gen. J. Lawton Collins, Chief of Staff, United States Army)이였다. 거제도를 포로수용소 장소로 선택한 주요 이유라고 두 사람이 밝힌 내용은
①(섬이기 때문에) 포로 관리에 최소의 인력과 경비가 소요될 것이다.
②급수가 용이하다.
③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장소가 있다는 점 등이었다.
특히 급수문제는 중요한 요소로서 고려되었는데, 근해에 있는 여러 섬 중에서 거제도 외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 공급이 가능한 섬을 찾기 어려웠다. 제주도에는 이미 많은 피란민이 들어차 있는데다가 그들이 사용할 물도 충분치 않아서 우물을 더 파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포로의 관리(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전쟁 전기간을 통하여 북한 및 중공군 포로에 대한 한국군 및 유엔군측의 관리 및 대우의 실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든 수용소의 위치도 공개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백색 또는 황색으로 PW표지가 되어 있어서 수용소 상공을 비행하는 항공기가 이 표지를 관측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공산군측의 포로 관리의 실상이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현상이었다.

유엔군 관할하의 모든 포로수용소들은 1949년 제네바협약의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엄격히 관리되고 있었으며, 그 실태가 국제적십자사 대표들에 의해 수시로 점검되고 있었다. 그리고 서방 언론들에 의해 언제든지 확인이 되고 지상을 통해 보도가 되었다. 전시라고 하는 악조건하에서도 유엔군측이 국제법 및 관례를 따라 포로를 관리하려고 노력한 것은 분명했다.

수용소의 질서는 포로자치제에 맡겨져 있었으므로 유엔군 수용소는 낙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장에서는 생각해볼 수도 없었던 숙사에서 하루 세끼의 식사를 제공받고, 하는 일이라고는 형식적인 작업이 고작이었다.
전장에서처럼 죽이고 죽는 전투도 없고, 발이 부르트도록 강행군을 하는 일도 없었으며 잠을 못자면서 경계근무를 설 필요도 없었다. 경비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든든하게 맡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겨울 추위가 와도 동상에 걸릴 염려가 없었다.포로수용소 내에서의 포로들의 일과는 통상 다음과 같았다.

오전 5시 30분
오전 6시 30분 전원 집합 점호
오전 7시 오전 일과 시작
오전 11시 30분 점심식사
오후 1시 작업 인원 집합, 오후 일과
오후 4시 일과 종료
오후 5시 저녁 식사
오후 8시 점호 후 취침

 

 

거제도로 옮겨진 포로문제(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부산에 있던 포로가 거제도로 옮겨옴에 따라서 포로문제도 자연히 거제도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몇 개월간은 비교적 평온했다. 이 기간은 수용소 부지 정리 및 시설의 확장, 포로 배치작업 등으로 분주한 때였다. 가끔 한국 경비병과 북한 포로 사이에 사소한 시비로 인해서 충돌이 발생하기는 했으나 큰 피해는 없었다. 이 시기에 있었던 싸움이나 저항은 집단적, 사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 감정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대부분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들이었다.
이때 쌍방이 다툼을 벌이게 되었던 원인 중의 하나는 한국군 경비병보다 북한 포로에 대한 대우가 더 좋다는 사실이었다. 포로 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는 미군 당국은 포로의 대우와 인권 존중이라는 제네바협약을 준수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그들에게 더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그래서 피복이나 급식면에서 경비병보다도 오히려 포로들이 더 낫다는 사실이 한국군 경비병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에도 포로들은 북한 인민군 군가를 부르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선동적인 연설을 하고 미국인을 격렬히 증오하는 구호를 외쳐대는 등의 저항 행동을 했다. 그와 함께 1951년 3월에 만도 여섯 번의 단식투쟁 및 연좌시위와 네 번의 자해사건이 발생했다.제네바협약은 포로의 인권을 보호하는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을 뿐, 포로들이 조직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시위를 전개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일까지 고려하지는 못했다. 이때문에 포로들의 저항 활동이 격렬해져도 그것을 저지·규제할 수 있는 규정이 없었다. 이렇게 볼 때 거제도는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의 표적이 될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로가 소요나 폭동을 일으키게 되면 제일 먼저 곤욕을 치르는 것은 한국군 경비병들이었다. 이들은 소수의 인원으로써 엄청나게 많은 포로들을 경비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군의 지휘를 받고 있어서 사실상 포로 관리에 대한 실권이 없다 는 것도 행동의 제약 요건이 되었다.경비 근무중에 한국군 경비병과 포로가 충돌해도 미군측에서는 가능하면 개입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던지, 아니면 휴전회담이 곧 시작되고 멀지 않아 전쟁이 끝날 것이므로 가만이 두면 문제 가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 포로수용소장들이 심각한 수난을 겪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6·25전쟁에서 포로수용소장직을 맡은 사람들의 심리가 위축되어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항운동의 시작(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거제도를 소요와 폭동으로 얼룩지게 했던 포로들의 단체 저항 움직임은 부산으로부터 포로를 수송하던 마지막 단계인 1951년 6월 부터 서서히 그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포로들이 새로운 수용소에 도착한 이 시기에 북한군 장교 포로들이 들어 있는 제7구역의 제72소구역에서 제일 먼저 문제가 발생했다.
6월 18일에 제72소구역에서 위생 검사와 급식 문제가 발단이 되어 포로들이 식사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켰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깡통을 두드리며 돌을 던지면서 날뛰었다. 식사 거부와 소동은 다음날 아침에도 계속되었다.

장교 포로인 그들은 인근에 있는 "모든 구역의 통제권"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수용소 당국이 그것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포로들은 식사를 치우기 위해 수용소안으로 들어간 작업반을 향해 돌을 던져서 미군 장교와 사병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 계속해서 포로들이 함성을 지르며 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으므로, 이에 대항해서 경비병들이 사격을 하였다. 사격을 받게 되자 정문으로 쇄도하던 포로들은 천막으로 되돌아갔고 결국 노래와 투석도 그쳤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3명의 포로가 죽었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거제도에서 포로들이 일으킨 저항운동이 단체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게 된 첫 번째 사례였다. 하지만 그 당시로는 이것이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의 서곡이 될 것이라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그런데 바로 그 다음달인 7월에 휴전회담이 열리자 수용소 내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조만간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포로송환이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많은 포로들이 북한 또는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는 뜻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포로들 간에 친공과 반공의 편갈림이 생기면서 양자 간의 마찰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용소 근처의 민간인이나 피란민을 돈으로 매수하여 외부의 게릴라를 통해 북한과 연락을 취하고 전언(傳言)이나 투석(投石), 시호통신(視互通信)등으로 타지역과 연락하여 암암리에 조직을 만들고 정보를 교환하였다. 또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도 시비거리나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서 저항의 빌미로 만들었다. 이처럼 친공포로의 조직이 위협적인 세력으로 형성되자 한편 으로 반공포로들도 단결하게 됨으로써 양자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반공계 포로는 조직면에서 친공계 포로들을 뒤따라가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친공포로의 활동이 처음부터 의도적이고 계획적이었던 반면, 반공포로의 활동은 자기 보호를 위한 자구책의 방편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이렇게 해서 수용소 내부는 소요와 난투극의 마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밤에는 경비병의 순찰이 없는 것을 기회로 해서 살인, 구타 행위가 빈발하여 희생자가 속출했으나 수용소 당국은 모른 척하였다. 사법권이 없는 수용소장으로서는 증거가 분명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사소한 일로 포로들이 시위와 난동을 부리는 행동은 1951년 7월에 일어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제2군수사령부는 여름 제복으로 포로들에게 붉은 색상의 짧은 소매 상의와 짧은 바지 한 벌씩을 지급했는데, 유독 북한군 포로들은 그 색상이 일본을 의미한다 하여 입기를 거부하여 옷뭉치를 집어던지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 과정에서 경비병들의 위협사격으로 3명의 포로가 사망하였다. 또 제65수용소의 포로들과 한국군 경비병들 간에 충돌이 벌어져서 포로 3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51년 후기에 유엔군사령부가 처음으로 북한 포로 첩보원들을 체포하였는데, 그들은 포로수용소 안에서 소동과 폭동을 선동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으며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진술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이런 실정을 보고 받고 현지를 시찰한 밴플리트 장군은 포로수용소 경비병력을 더 보내도록 해서, 1951년 말에는 9,500명이나 되는 관리 요원이 거제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수용소에서 요구했던 규모보다는 6천명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경비 태세는 어느 정도 좋아졌으나 구역 내에서의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투쟁은 계속 가열되기만 했다. 어느 한 편이 상대에게 전면 항복하지 않는 한 구역 내의 패권 싸움, 예를 들면 구타, 사형(私刑), 인민재판과 이것들을 제지하거나 보복하려고 하는 폭력 행위 등은 그칠 수가 없었다. 급기야 1951년 12월 18일에는 투석전이 일어나서 14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처럼 흥분된 분위기는 포로심사 문제가 대두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해방운동과 특별공작대(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포로들이 거제도로 이송된 후 포로수용소가 제자리를 잡은 51년 4월부터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소위 [해방동맹] (일명 [용광로])이라는 비밀 조직체를 만들어 그 본부를 제77수용소에다 두고 각 수용소 단위로 지부를 두었다. 그리고 친공포로들의 모든 행동은 해방동맹의 명령과 지시에 의해 좌우되었다. 해방동맹의 내부 조직으로는 군사행동부, 정치보위부, 내무부, 민청행동결사대, 당간부학교, 인민재판소 등을 편성하여 마치 포로로 구성된 소정부를 형성한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런 해방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움직인 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해방동맹을 조직하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자는 북한 공산군 전사 출신이라고 알려진 홍철인데 그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배후 인물임엔 틀림없다는 주장이 있다. 홍 외에 또 한 사람으로 이학구 총좌가 있었다. 그는 남침 당시 북한 인민군 제2군단 작전참모였고, 낙동강전선에서는 제13사단 참모장으로서 1950년 9월 21일 다부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으로 투항해 온 사람이었다. 그는 포로 중의 최고위 계급자로서 해방동맹을 조직한 실질적 인물은 아니더라도 홍철과 더불어 그 조직을 조종하는 인물임엔 틀림없었다.

어쨌든 계급이 높았던 만큼 이학구는 표면상으로는 포로의 대표 행세를 하였다. 그가 정체 불명의 인물과 더불어 전수용소의 통솔권을 장악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판문점 회담이 절정에 이르자 그는 전 거제도 수용소의 이른바 대열 강화 사업에 착수, 비밀리에 각 수용소 간의 통신망을 조직하여 각종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또 그는 수용소 당국에서 요구하는 포로 명부 작성 제출도 거부케 하고 송환 분류 심사에도 응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1951년 5월에는 제92구역에 북조선 노동당 거제도 지부가 조직되었고, 각 구역에도 연락소가 조직되었다.이들은 '생명을 희생하여 당을 위해 능력을 발휘'한다는 선언서를 채택하고 저항활동을 펼쳤다. 친공포로들의 표면적인 최초 행동은 수용소 내에서 적기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수용소 당국에서 하등의 제재가 없자 그들은 더욱 대담해져서 인공기를 게양하고 어느새 인민군 복장까지 만들어 입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보급품을 팔아서 광목을 구입하여 큰 글씨로 『민족반역자 이승만을 때려 죽여라!』『미제국주의 침략자를 타도하자!』 등의 플래카드를 우리말과 영문으로 써서 철조망에 내걸었다.

이렇게까지 수용소 안이 온통 친공포로들의 광란장소로 변하여도 수용소를 관리하는 미군 당국은 그냥 보고만 있는 자세였다. 수용소장은 후방기지 사령관(수용소 관할의 직속 상급 사령관)이나 또는 그 이상의 지휘 계통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지시도 받지 못하고 있어서, 그로서는 포로를 제약할 수 있는 방도가 달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고급 사령부의 이러한 무관심은 휴전이 성립되는대로 포로들을 송환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건의 초기에 신경을 써서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 사태를 악화시키는데 일조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한국군의 경비 책임자나 감시병들의 분노는 말할 수 없었지만 포로 관리에 대한 권한이 없고 경비 담당에 지나지 않아 별 도리가 없었다. 만약 한국군에 관리권이 있었다면 친공포로들이 그렇게 날뛰지 못했을 것이며, 무법천지같은 혼란 상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 한국군이나 유엔군의 포로들이 북한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유엔군 당국은 알고 있었다. 만일 유엔군측도 공산군측의 수법 그대로 친공포로를 다루었더라면, 그들이 감히 포로가 된 나라의 수용소에서 자기 나라의 기를 게양하고 자기 나라 노래를 공공연히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이러한 때, 북한측에서는 [특별공작대]라는 특수 조직체를 만들어 암약하기 시작했다. 북한군 총사령부에 소속된 이 조직체의 임무는 전선에서 자진 투항하여 포로의 신분으로 수용소에 들어가 특별 지도 사명을 수행할 공작대원을 훈련시키는 한편, 포로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 공작대는 사실상 남일에 의해 지휘되었는데, 그는 북한 공산군내 정치보위부의 책임자로서 이런 일은 그의 소관이었다. 남일은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직접 특별공작대를 편성하고 2개월에 걸쳐 각종 훈련과 교육을 시킨 다음 조직적으로 전선을 통해 수용소에 침투시켰다.
 
한편 수용소의 외부에서 암약하는 남녀 공작대원들은 피란민으로 가장, 남하한 다음에 간호원 등으로 포로수용소 병원에 취직하거나 수용소 부근에서 적당한 장사를 하면서 내외의 연락을 유지하는 일을 담당했다. 수용소 내에 침투한 공작대원들은 지령에 의해 먼저 각 단위 수용소 내에 세포조 직위원회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수용소 내에 위계 체 계를 세우기 위해 장교들을 세포 조직망의 책임자로 배치시켰 다. 계급이 지배력을 갖도록 함으로써 목적을 달성코자 했던 것인데 이학구 총좌가 표면적으로 포로의 대표가 된 것은 이런 데서 연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별 공작대원들의 또다른 임무는 각 포로들의 과거와 현재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즉, 포로들이 포로가 된 동기를 조사하고 수용소에 들어온 후 변절한 자, 자발적 이탈자, 밀고의 혐의가 있는 자 등을 가려내는 일이었다.

공작대 활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통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의 통신 구조는 ①각 수용소 내의 연락망, ②수용소측 지휘부에서 수용소 내의 일반 포로 및 공작대원들에게 연결되는 연락망, ③수용소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연락망의 3원적(三元的)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포로들의 통신본부는 제64포로병원 장교 병동이었다. 모든 통신 정보와 지령은 일단 장교병동에 집중되었다가 분배되었다. 외부로 보낼 통신을 가진 포로들은 환자로 가장하여 입원하였으며, 퇴원하는 환자들이 그것을 받아 각 수용소에 전달하였다.

또한 공산군 총사령부는 거제도 포로와 판문점 대표들 간의 공동 노력을 조정하기 위한 통신 방법으로서 [첩보부]와 [유격지도부]를 이용하였다. 유격지도부는 통신을 전달할 급사를 파견하였고, 첩보부는 10∼12명의 장교와 하사관으로 편성된 공작대를 내보냈다. 이 공작대는 소련제 휴대용 무전 수신기를 갖고 구역 간 통신 연락을 담당하였다. 이 두 기관은 포로들의 통신을 그들의 총사령부에 전달하는 일도 수행하였다.그러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으로 연락하는 통신은 어떠한 경로를 밟았던가? 이는 남한의 공산 간첩망을 조종하고 있는 첩보부의 비밀정보대에서 관장하였다. 이 공작대원들은 피란민으로 가장하여 수용소 부근의 민간 부락이나 피란민 부락에 잠입했다.
그들은 포로작업대가 수용소 밖으로 나오면서 약속된 장소에 투하해 놓은 통신문을 북으로 보내고, 또 같은 방법으로 북의 지령문을 포로들에게 전달하는 통신 수단을 주로 썼다.

특별공작대의 암약이 시작되자 공산측에서는 거제도 포로 전체를 지휘할 우두머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목적으로 밀파된 자가 북조선노동당의 부위원장 감투를 쓰고 있던 박상현이라는 자였다. 그는 전선에서 계획적으로 포로가 되어 1951년 11월경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들어오게 되었다.무명 전사로서 위장하여 제77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박상현은 해방동맹의 조직을 인수하여 각 수용소의 세포 조직을 재점검, 정비 확대하고 일사불란한 지휘 계통을 확립했다. 따라서 그동안 포로 대표였던 이학구는 명목상의 대표가 되고 모든 실권은 박상현에게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특별공작대와 해방동맹은 북한군 총사령부에서 내리는 지령에 의해 언제든지 행동할 수 있도록 조직의 정비를 완료했던 것이다. 이후 박상현은 수용소장 돗드 준장 납치사건 등 온갖 폭동사건을 현장에서 조종하였다. 그러나 그후 그는 이학구 등과 더불어 폭동의 주모자로서 수용소 당국에 체포되었다. 분리 수용된 그는 밀파되어 온 최후 목표가 달성되기 전에 수용소 내의 조직이 와해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북에서 받은 지령, 포로 조직, 투쟁 계획과 운영 방법, 남일의 지령 등 일체의 내용을 스스로 폭로했다. 그는 그후 또다시 변절하여 포로 송환 때 북한으로 가서 이학구와 더불어 환대를 받고 건설사단장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얼마 후 여러 가지 죄명을 뒤집어 쓴 끝에 숙청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환심사에 대한 항거폭동(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휴전 회담에서 포로 문제가 논의될 때 가장 격렬하게 대립되고 또 오랫동안 쟁점이 되었던 점은 '자원송환' 과 '강제송환'이었다. 자원송환은 포로 본인의 의사를 물어 송환 여부를 결정케 하는 것으로서 이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은 유엔군측에서도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공산군측에서도 궁금하게 여기던 사항이었다. 따라서 공산군측 대표는 북한 및 중국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포로가 실제로 얼마나 되는가를 알고자 포로들을 심사한 다음 그 포로 수를 제시하라고 유엔군측에 요구했다. 그런데 이처럼 송환 여부를 알고자 그 심사 실시를 인정하고서도 공산군측은 포로들에게 분류심사를 거부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남일이 바로 그 주모자로서 그는 회담 장소에서는 송환 거부 포로 숫자를 제시하라고 유엔군 측에 요구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거제도의 박상현에게 송환 심사를 거부하라고 지령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주장대로 강제송환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친공포로들은 포로 명부 제출을 거부하는 동시에 송환 심사에도 응하지 않도록 단단히 지시를 받고 있었다.

심사를 실시하지 못한 구역 중에는 제62구역이 있었다. 여기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완전히 통제를 하고 '전원이 북한으로의 귀환을 희망하고 있으므로 심사는 시간 낭비'라고 선언하면서 유엔군측 심사관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엔군측은 심사를 강행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서 실력 행사를 계획하였다. 이 구역에는 대부분 서울 출신의 의용군들이 있었으며 그중 절반이 대학 재학생으로서 사상적으로는 완전한 적색분자의 친공 수용소였다. 포로수용소 당국도 이런 형편을 알고 있었으므로 심사반은 신중한 계획을 세워 무장 병력의 특별 엄호하에 집단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구역을 4분하여 격리시키고 각 소구역별로 심사를 실시키로 하였다.
 
그래서 1952년 2월 18일, 새벽 2시부터 수용소 내의 통행이 금지되고 날이 밝을 무렵에는 심사반과 함께 착검한 미 제25사단 제27연대 제3대대 병력이 수용소 내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막상 심사를 하려고 수용소에 들어가자 포로들은 미리 준비해두고 있던 몽둥이, 도끼, 삽, 곡괭이 자루, 칼, 죽창, 천막지주 등을 휘두르며 저항하였다. 그리고 1,000∼1,500명의 포로들이 일렬로 서 있는 경비병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되자 양측은 격돌하게 되었고, 수용소 안은 일대 격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미군들은 처음에는 공포탄을 발사하였으나 포로들이 달려들자 마침내는 발포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폭동은 진압되었으나 이 사고로 55명의 포로가 즉사하고 162명이 부상당했으며 부상자 중에서 22명은 병원에서 죽었다. 미군의 사상은 사망자 1명, 부상자 38명이었다.이 사건으로 수용소장인 피츠랄드 대령은 부사령관으로 격하되고 2월 20일 새로운 사령관으로 돗드(Francis T. Dodd) 준장이 부임하였다. 또 이 사건에 대해 미 공간사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치른 대가는 컸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인명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오직 목적 달성만이 문제였다. 결국 그들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미군은 철수했고 이 구역은 다시 심사하지 않았다."고 기술되어 있다.이 사건은 공산측의 선전 자료가 되어 1952년 3월 초순 판문점에서는 항의 소동이 일어났다. 유엔군측은, 민간인 억류자 심사는 한국의 내정 문제이며 휴전회담의 범위 밖이라고 하여 곤경을 모면했다. 그러나, 유엔군사령관이 수용소장을 경질하고, 제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에게 '자체 계획에 의하여 포로를 철저히 통제하라'고 지시했던 사실을 보면, 이 사건으로 인한 충격이 대단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수용소 내의 지휘 계통을 확립하고 이런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포로들의 소동은 전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공포로 학살사건(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1951년 8월 말까지 거제도와 부산에서는 포로들 간에도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특히 거제도는 친공포로들의 폭력 행사로 더욱 살벌해지고 있었다. 양쪽은 수용소의 각 구역 내에서 자기 편의 인원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폭력이 횡행했으며 특히 친공계열이 우세한 곳에서는 매일 인민재판이 열렸다. 비록 반공주의자들이 다수인 경우에도 친공포로들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핵심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이 잘 되고 계획된 방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친공포로들이 주도한 반공포로 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은 1951년 9월 17일에 일어난 일이다. 이날 밤 제77수용소에 있던 해방동맹 본부에서는 비밀리에 대원들을 모아놓고,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이 대공세를 취하여 부산이 벌써 북한 공산군 수중에 들어 왔으며, 그 중 선봉대로서 1개 대대가 거제도에 상륙하여 포로들을 해방시키려고 전진 중에 있다." 고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 말로 그들을 현혹시켰다. 그리고 거제도에 상륙할 그 선봉부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투쟁 실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 투쟁 실적이란 것이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처단'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지령과 선전 선동은 즉각적으로 모든 친공포로들을 자극함으로써 그중 일부는 미치광이가 되어 수용소마다 반공포로들을 찾아내어 운동장으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형식적인 소위 인민재판을 한 후 즉석에서 타살하였다. 각 수용소에서는 10명 내지 30명씩의 반공포로들이 무참하게 학살 당함으로써 전 수용소에서 희생된 숫자는 300명에 달했다.

9·17사건이라 불리는 이 폭동은 9월 20일까지 계속되어 각수용소에는 인공기가 나부끼고 거제도가 마치 공산군의 병영이라도 된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다만 우익계가 장악한 포로수용소에서는 이와 같은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좌익계가 열세하여 폭동을 일으키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이 사건은 좌익 친공포로들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 반대로 우익 반공포로들에게는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더욱 공고한 단결을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도 포로수용소 당국은 종전과 다름없이 철조망 밖에서 감시만 할 뿐이었다. 특히 밤에는 친공포로들이 천막 안에서 반공포로를 상대로 사형(私刑)을 가하거나 살해를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살해를 할 때도 특급이라 하여 돌로 머리를 쪼아서 타살하고, 1급은 곤봉 500대, 2급은 400대, 3급은 300대를 치는데 대개 30대 정도에서 절명하였다고 한다. 시체는 솜으로 입을 틀어 막은 다음 변소 또는 수용소내 땅에 매장하거나 때로는 철조망밖에 버리기도 했다.

이런 중에서도 그해 12월 23일 밤에 제73구역에서는 150명의 친공포로들이 성탄절 축하 준비를 하고 있던 반공포로 60명을 습격, 난타하여 한 명이 죽고, 32명이 중경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수용소 내에서의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세력 다툼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으며, 언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는 긴장된 날들이 계속되었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격돌(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1952년초 친공포로의 송환 분류 심사 거부로 일어난 2.18 폭동이 진압되고 나서도 각 친공 수용소에서는 밤마다 반공포로들이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타살되고 있었다.이 해 3월 16일 오후에는 친공포로 일색인 제95구역에서 약 50명의 반공포로들이 결사적으로 탈출하여 철조망 쪽으로 달려 나왔다.
친공포로들은 이들을 향하여 돌을 던졌다. 사지를 탈출하려는 포로들을 국군 감시병들이 보호했고, 수용소 소장 돗드 준장이 현장에 나타났다. 소장의 명령으로 수용소 정문이 열리자 사지를 빠져나온 반공포로들은 수용소장에게 제92, 95구역의 수용소를 해산시키고 우익계 포로들을 구출하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95수용소 안에는 우리와 같은 동지들이 많이 있는데 오늘 중으로 나오지 못하면 다 죽게 된다. 나오다가 잡힌 사람도 많이 있다. 그리고 놈들은 사람을 죽여서 그 피로 깃발을 만든다. 저 지붕 위에 있는 인공기를 봐라."
95수용소에 걸려 있는 깃발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물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육안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빛깔은 자색으로 변색되었고, 기폭이 뻣뻣해져서 바람에 잘 나부끼지도 않았다.

반공포로들의 탈출을 목도한 반공청년단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다음 날인 17일에 반공 총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 이를 우익계 수용소인 제71, 72, 73, 74. 81, 82, 83, 84, 91, 93, 94, 96 등 각 구역에 통보했다. 반공 총궐기대회는 비폭력으로 각 수용소 안에 태극기를 걸고 각종 구호를 외치며 인접해 있는 좌익계 수용소를 위압한다는 단조로운 시위였다. 그리고 제93구역에서는 제92, 95구역 등 좌익계 수용소에 대하여도 적극적인 시위를 하기 위해 국군 제33경비대대 소속인 제5중대장의 협조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17일 아침 각 수용소에서는 하늘 높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목이 터지도록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기세를 올렸다. 오후에는 계획대로 제93구역을 비롯한 제91, 94, 96구역에서 반공 시위를 감행했는데 이 때에는 제5경비중대장 강대위가 지휘하는 소대병력이 이들을 엄호하고 있었다.시위 행진부대는 친공 제92구역 앞길을 지나면서 구호를 제창했다. 이 때 제92구역에서는 시위부대에 대해 투석공격을 시작했다. 시위부대는 많은 인원이 부상을 입었으나 대항은 하지 않고 그대로 전진하였다. 그러다가 참다못한 강대위가 권총을 뽑아 사격 신호를 내렸다. 사방의 국군 감시대에서는 일제히 공중에다 위협사격을 가했다. 그래도 친공포로들은 계속 돌을 던졌다. 총성 때문에 미군 감시병들까지 출동했으나 그들은 가세하지 않았다. 총에는 당할 수 없었던지 친공포로들의 투석이 줄어들어 멈추자 사격도 멈췄다. 우익 시위부대들은 부상자들을 수습하여 각 수용소로 돌아갔다. 수용소 내로 들어가서도 밤새도록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는 전체 우익 수용소에서 반공 총궐기대회의 명목 아래 18일에도 계속되었다.

17일의 충돌로 친공 제92구역소의 희생자는 30여명 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병원으로 실려갈 정도의 중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이 경비대에게. 사격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주고 도전을 가해. 왔으므로 지금껏 참아온 울분을 응징한 것이라고. 우익계 포로들은 생각하였다. 이런 시위는. 29일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좌익계 수용소인 제76, 77, 78구역에서도. 우익과 맞서서 또다른 시위를 벌이고, 수용소. 벽과 철조망에 삐라와 플래카드를 게시하였다.. 양쪽이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포로들의 시위로 좌우익간의 충돌이 우려되자 한·미경비대는 비상 경계에 들어갔다. 이때 제77구역 내에는 우익계 포로 약 160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탈출 포로의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미군 당국은 한발짝도 수용소 안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분명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제95구역은 이후에도 악질 친공포로의 소굴로서 포로수용소 당국도 접근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한국군 경비대와도 충돌을 일으켰다. 이 구역은 국군 제33경비대대 제5중대 경비구역이었는데, 1952년 4월 10일에도 경비병과 포로들 간의 욕설이 빌미가 되어 가벼운 총격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한·미 경비병과 포로들 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한국군 경비대측에서는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미군 대위 1명이 부상을 입는 결과를 빚었다. 포로측은 30명이 피살되고 80명이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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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를 사러 간다고 임실에 왔다. 주소지 입력해 도착했더니 세상에 경치가 말그대로 죽인다.

'이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 집은 이 집 한채뿐이다. 마을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같은 곳의 집 한채다... 우와~~~

 

근데 역시 사진은 그것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구나...

 

 

 

 

 

 

 

오디 차에 싣고  이모가 차를 빼는 동안 주위를 보는데, 이젠 흔한 꽃도 이쁘다. 경치가 좋으니 그런가보다

 

 

이게 웬 푠말인가 싶어 보니 효령대군(태종의 2째 아들이며, 세종대왕의 바로 윗형)의 8세손을 기리는 거란다.... 뭔지 몰라도 뭔가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겠지 그러니 이렇게 기리는 비를 세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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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사고지를 보기위해 차로 이동을 했는데, 차를 세울만한 곳을 찾다가 그냥 길있는대로 올라왔더니 적상산성이다.

그냥 돌 쌓아 벽을 만든걸 보니 이게 산성이구나 싶다.

 

 

 

길을 따라 오면 안국사 주차장이 있는데, 나비들이 무지 많다. 사진을 찍으니 표가 잘 나질 않는데, 검정콜 흐트려 놓은것 같다. 여하튼 검정콩처럼 보이는게 다 나비다

 

 

 

 

 

 

직지사처럼 작은 불상드이 양쪽에 좍~~~~ 가만보니 동자승이 아니다. 직지사는 동자승이었는데

 

 

 

 

 

 

여긴 찻집인줄 알고 들어가 보니ㅠ세계 각국의 불상을 모아 놓았다. 지금보니 박물관이라고 적혀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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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와인동굴에서 나오니 허전하다 그래서 안내하는 사람이 더 올라가면 전망대 갈수있고, 볼게 많다기에 올라기기 시작~~

먼저 적상호가 보인다. 차를 타면 적상호를 한바퀴 돌고 나서 전망대로 갈 수 있다. 드라이브코스로는 짱인듯

 

 

 

 

 

적상산 전망대를 올라가면 정말~~ 세상이 발 아래에 있다.

 

여긴 방금 가봤던 머루와인동굴... 확대를 해도 이렇게 귀여운 모형같다.

 

 

 

전망대를 한바퀴 돌면서 찍으면 밑을 찍으면 비행기에서 대륙을 찍는것처럼 모든게 아기자기한 모형같고, 위성에서 찍는 실사같다. 우와신남 동글이

속이 뻥 뚤리는 느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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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와인동굴 가기위해 나와서 여행센터가서 지도 받으면서 추천을 해 달라고 하니 역시 머루와인동굴을 먼저 말한다. 그래서 출발~~~ 도착하니 또 티켓을 사야한다. 요즘은 어딜가나 돈이로구나.... 별거 없어도 돈을 달란다. 단 돈 천원이라도.. 그래 유지를 위해서 돈 받는건 전혀 이해가 안되는건 아닌데,,,

 

 이동한다고 힘든데 티켓산다고 땡볕에 또 줄을 설려니 슬슬 짜증이 난다.

게다가 이건 머루주스를 마실수 있는 교환권이란다

 

 

 

 

 

들어서니 입김까지 날 정도로 춥다. 금방 덥다가 이젠 춥다.(이 여행을 마친 후 결국 난 몸살을 앓았다.엉엉 회색동글이)

 

 

 

천장은 별자리가 되어있다. 혼자서 열심히 천장을 올려보며 찍었다. 다른사람들은 관심이 없는듯

 

 

 

 

사진은 흐리게 나오긴 했는데, 양 옆에 아주 옛날 사진들이 있었다. 머루와인과 상관없는것도 많았는데, 옛날이야기에 옛날사진을 덧붙여 놨다고 해야할까? 나는 잼있었는데, 다들 동굴끝에 있는 목적지 땜에 관심을 주질 않는다

 

 

동굴끝엔 크리스마스로 꾸며놨다. 일하는 사람들은 겨울 패딩을 입고 있고,,,와인은 시음만 하고 나왔다.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지라 2만원 정도 주고 사도 그냥 벌컥벌컥 이틀에 끝낼 양이라. 난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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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축제를 보러가자는 이모의 말에 집에 있는것 보단 낫겠지 싶어 나섰다. 어짜피 밤에 볼 수 있으니 오후에 출발해 도착하니 7시. 티켓부터 사고 이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잘 꾸며 놨기에 이것 저것 구경하며 사진찍었다.

공룡모형은 아이들이 좋아하고

 

 

 

 

이런 길은 연인들과 부부가 많이 좋아하는데, 우린 여자 셋이서 돌아다녔다.

 

 

 

 

 

 

 

 

 

 

저녁먹기 위해 무주에 유명한 어죽하는 곳을 찾다가 겨우 들어가 먹었다. 오~~  양이 적긴 했지만 맛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나와서 버스 타고 출발했는데, 하루 종일 흐려서 그런지 반딧불이가 거의 없다. 다 합쳐서 10마리 봤을라나 그것도 멀리 반짝이는 것만봤다.

 

습하고 더울 때 많이 나오는데, 오늘은 추워서 그렇다는데 뭐라 할수도 없고.... 어두워 발밑을 본다고 핸드폰 플레시 켜서 도우미들이 끄라고 소리치고,,,, 솔직히 난 상관없었는데, 이모가 힘들어했다. 앞이 안보인다고.

 

완전 더울 때 또한다고 하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더 큰 반딧불이라서 아주 잘 보일꺼란다.... 한번오기도 힘든데, 다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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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보가 어딘지 궁금했는데, 대구 성서계대 지나서 있단다. 잉?? 하니, 이모가 말 나온김에 가보자고 해서 출발!!

망우공원에서 출발해 도착하니 마침 어둑해져서 멀리서도 잘 보인다.

배모양으로 야경이 죽이는 건물은 디아크문화관으로 안에 들어가볼수도 있고 커피숍도 있어서 앉아서 밖을 보는 것도 가능하고 분수도 있다는데,,,, 6시까지 한다고 한다. 커피숍은 늦게까지 하는 것 같긴한데,,, 이미 배가 불러서 올라가기 귀찮아 패스

 

 

 

 

 

 

 

 

 

 

 

 

 

 

 

강정보 다리 가보니 차가 다니는 곳이 아니다. 인도와 중간에는 자전거 전용도로다. 우와좋아 동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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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프로그램에서 나온 물회 먹겠다고 포항으로 고고(나야 맛집에는 관심이 없고 이모랑 사촌동생의 폭풍식욕으로 출발)

물회먹는데, 난 역시 잘 모르겠다. 같이간 일행도 같은 이야기를 하기에 얼른 먹고 나와서 보니 오~~ 야경이 볼만하다.

물회집에 들어갈 때만해도 어둠지 않아 안보이던 풍경이 보이는데, 그냥 발길이 그 쪽으로 향한다.

 

그래서 다들 소화시킬겸 걷자고 해서 걸어가면서도 계속 사진만 찍는다. 근데, 내 핸펀 사진은 영~~ 아니올시다.

 

결국 사촌언니 핸펀으로만 찍고, 카톡으로 사진 공유해서 받았다. 역시 짱

 

 

 

 

 

 

 

 

 

 

 

 

 

 

 

바닥에 불빛모양이 하트였다가 물결이었다가 신기하기에 찍었는데, 모양 바뀔 때마다 그 모양을 배경으로 찍겠다고 사촌언니와 사촌동생이 움직이질 않는다.... 나야 귀차나즘 발동으로 그냥 구경만 했는데, 사진은 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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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신 묘---초등학생 들인것 같은데, 단체로 와서 저렇게 앉아 설명 듣는데, 한참을 앉아 있기에 그냥 같이 찍었다.

 

 

 

 

무덤을 둘러싼 12지신들~~

 

 

 

 

 

 

 

 

 

 

 

 

 

 

 

자전거 빌려서 대릉원에  도착!!!!

 

 

 

 

 

여긴 그 유명한 천마가 있어서 천마총!!!

 

 

 

 

안압지로 이동 중에 보이는 첨성대 예전엔 첨성대도 입장료가 있었다는 지금은 그냥~~~

 

 

 

안압지~ 친구가 보내준 야경이 참 아름다웠는데, 역시 여긴 밤에 와서 찍어야 할 듯. 하지만 나의 일정대로라면 야경을 볼수가 없다. 힝

 

 

 

 

 

 

월정교라는 곳인데, 공사중이라 이렇게 멀리서 찍었다.

 

 

 

 

여긴 계림~~~ 시간이 넉넉지 않아 건너뛰었던 곳이었는데, 가는 길목에 있기에 들어가보자고 우겨서 들어왔건만 너무 좋다. 내가 오늘 경주에 와서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이다.

 

 

 

 

 

 

 

 계림 안에 내물왕릉이 있을 줄이야~~ 걸어오면서 무덤이 보이기에 저게 왕릉이면 대박이다. 라고 했는데,, 진짜 왕릉이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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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축제 첫날인데도 걱정을 많이 했다. 올해 벚꽃이 워낙 일찍 피어서 다 떨어졌으면 어쩌나 싶어서 다행이도 다 떨어지진 않았다.

 

좀 일찍와서 그런지 사람들도 많이 없고, 걷기도 좋고

날씨는... 춥고 심지어 비가 오기까지 했지만 난 옷을 두껍게 입었는데, 친구가 얇게 입어서 감기걸릴까 걱정이었다.

 

보문단지로 많이 갈꺼라 예상하고 우리는 김유신장군묘있는 쪽을 선택했다. 마라톤경기가 있어서 그냥 걸어서 다녔는데, 경주가 좁아서 좋네,,, 거리가 고만고만하다.

 

그래서 갈때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경주역까지 걸어서 갔으니, 1시간도 안걸렸다.

 

벚꽃길이 많이 길지 않았고, 일찍 온 탓도 있어서 시간이 많이 남기에 자전거 빌려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은것 중에 벚꽃 사진만 모아도 이렇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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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영교

 

 

 

 

월령교에서 본 풍경

 

 

 

 

 

 

 

 

석빙고

 

 

 

 

 

월령교와 석빙고를 지나 나오는 건물들 그 중엔 안동댐 건설로 복원된 집도 있다.

 

 

비가와서 빗물이 꽃처럼 보이기에 찍었는데, 사진으론 표시가 잘 나질 않는다.

 

 

 

 

 

 

 

 

 

 

 

 

 

 

 

 

 

 

 

 

 

 

 

 

 

 

 

 

 

 

드라마 촬영지

 찾기가 좀 어려웠다. 겨우 찾았더니 볼게 없었다. 근데, 제트보트는 완전 재미있었다. 대박!!!

웬만한 놀이기구보다도 더 짱!!!!!

꼭 타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긴 성곽인것 같긴한데,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다.

 

 

 

 

 

 

 

도산서원

 

도산서원 앞의 풍경... 감탄이 절로 나온다.

 

 

 

 

 

시사단 

 

 

 

 

 

 

 

 

 

도산서원 입구

 

 

 

입구에 나무들이 참 특이하다.

 

 

 

우물의 이름이... 잘~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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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가봐야지 했는데, 이리 가까운 곳에 있는 줄 몰랐다.

2달을 넘게 신천을 걸어다녔으면서 팻말도 보질 못해서 가까운 곳에 있을 꺼란

생각은 안하고 나중에 날잡아서 한번 가봐야지 했다.

 

몇달 전부터 성남이에게 신천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이 날이 시간이 되어 갔는데, 성남이가 팻말을 봤단다.

잘 못 본 거겠지 했는데, 중구 관광안내도에 진짜 수성교에서 신천을 따라 김광석 길이 표시가 되어있다.

 

다행히 그리 급할 것도 없이 구경삼아 운동겸해서 나온거라 돌아오는 길에 들렀는데, 완전 좋다.

우선 사진찍으면 너무 잘 나온다.

 

 

 

 

 

 

 

김광석 사진도 있고

 

 

 

 

 

 

 

 

 

 

모형전화기도 있는데, 상태가 이 모양이다.

 

 

 

 

뭔가 위에서 그림자가 움직이기에 보니 가로등에 기타모형이 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해서 찍으니 사진이 잘 나온다. -- 하지만 성남이는 체육복차림이고 난..사진찍는거 안좋아하고

 

 

 

이렇게 앉아서 사진찍을 수 있게 해 놓은 데가 많다.

 

 

 

 

 

가사가 적혀있는데, 음~~ 내가 잘 아는 나의노래는 없더라

 

 

 

 

 

 

 

앨범에 대해서도 나와있다.

 

 

 

 

여기도 사진찍으니 완전 그림!!!!--- 사실 그림 맞다.^^

 

 

 

 

위에 사진에서 왼쪽에 적힌 내용만 찍은건데, 이거 ...

남자의자격에서 오토바이 타기 배우는거 나올 때 이 글귀가 나왔었다.

 

 

 

김광석이 기타들고 있는 익살스러운 모습---근데 3선 핑크 슬리퍼 신고 있다.

 

 

 

 

 

 

 

가보니 다들 사진찍는다고 정신없다. 여긴 진짜 사진기 필수로 가져가야 한다.

기술없이 그냥 찍어도 사진이 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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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이랑

 

전날 허브힐즈 가기로 하고 멤버십 가입후 50%할인 입장권 받아서 할인 받은 티켓!!

 

 

 입장하고 나면 바로 이렇게 메타세콰이어가 보인다.

 

 

근데 아침부터 너무 더워서 집에서 준비할 때부터 땀이 나더니 나와서 성남이 만나니 이미 지쳤다.

버스타고 내려 좀만 걸으니 힘들어서 초반부터 사진은 모두 패스!!!1

 

내 사진 찍을 여력도 남아 있질 않고, 귀차니즘으로 걷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마땅히 앉을 때는 없고,

배가 고프질 않는데, 밥먹으로 식당에 들어갈 수도 없고, 터덜터덜 흐느적 거리는 몸을 이끌고 계속 돌아다녔더니

힘들다.

 

 

여긴 산림욕 끝자락에서 찍은 사진

 

 

 

 

샌들 신고와서 발도 아프고, 예초부터 족욕 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왔건만, 오늘 안한다고 해서

그냥 계곡에서 찍은 사진...검은 옷이 성남이!!

 

 

 배가 안고파서 2시 되어서야 허브네로 이동

 

자리에 앉아 메뉴선택 후 카운터로 가서 선불로 결제 후 기다리니 음식이 나온다.

 

 

허브돈가스, 허브 비빔밥이당

 

 허브돈가스(8천원) -- - 튀김옷 안에 고기위에 살짝 아주 살짝 뿌려진 허브!! 밖엔 없구만

 

 

 허브비빔밥(8천원)---소고기는 호주산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소고기는 없었다.

나야 소고기 안 좋아하니 괜찮았지만 성남인 배신이라고 느꼈을꺼다...

 

맛은 있지만 비싼건 어쩔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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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공연 망치고 몸 상태 별로인데도 불구하고 이때가 아니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산병원으로 갔다.

동산병원에 다니는 보예가 선교 박물관과 3.1만세 운동길을 안다기에 같이 가자고 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갔다.

 

동산병원 입구로 해서 이동했는데, 주차장 가는 길로 가면 더 찾기가 쉬울 것 같다.

 

 

먼저 의료선교 박물관 ---  여기를 보기위해 외국인들이 많이 온다고 보예가 말해줬다. 이곳을 묻는 외국인이 많다고

 

 

 

뒤에 보이는 건물이 대구 제일교회

 

 

선교 박물관에 서양의 사과나무(사과나무 100년 )가 처음으로 심어진 곳이고 종(100주년 기념 종)도 있다.

 줄을 당겨보고 싶었는데, 참았다.

보예 뒷모습^^

 

 

바로 옆에 이렇게 대나무만 있는 곳이 있어서 사진을 찍었다. 외할머니 집이 생각났다.

성주 외할머니집에서 마루에 있는 뒷문을 열면 딱 이모습었는데, 바로 뒤가 대나무 숲이라서... 그립다.

 

 

 

좋아 보여서 찍었는데, 그저 그러네

 

 

이게 제일교회 건물이라고 했나?? 기억이 안나네^^;

 

 

 

각시탈이라고 적힌 차 두대가 서있기에 보예가 가보자고 해서 가까이 갔다. 촬영을 한다는 소리에 보예 흥분했다.

"혹시 주원~~~~~~~~"이라면서!!! 지나가는 사람이 차유리 닦는 아저씨한테 물어보는데,

대답이 밤에 촬영한다고 한다.

 

동산병원에서 촬영 많이 한다고 보예가 핸드폰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데, 사랑비 촬영장면과 더킹투하츠다.

사랑비촬영때는 서인국, 김시후, 이미연, 정진영을 봤단다. 정진영 이름이 나올 때 내 목소리가 커졌다.

"나 정진영 완전 좋아하는데~~" 하지만 장근석과 윤아를 못봤다고 아쉬워 하는 보예^^

 

그리고 더킹투하츠 찍을 때 인민병원으로 나왔다고, 병원앞에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에 빨간 천들이 걸려져 있어서 놀랐다고 말하면서 사진 보여주는데, 하지원이 유산해서 입원한 장면이다. 헐~~ 그랬군

 

 

 

지하철 공사한다고 입구였던 이것이 구석으로 옮겨졌다.

 

옆에서 찍은 1899년 이 적힌 입구사진

 

 

선교사 챔니스 주택

 

 

 

선교사 블레어 주택

 

 

 

3.1운동길 90계단

 

 

계단 옆으로 이렇게 옛날 사진과 설명이 있다.

---신기하다. 시간을 초월한 느낌(역사유적지에서는 항상 이렇다.)

 

 

 

 

 

 

 

 

계단을 다 내려와서 찍은 사진

 

 

역시 계단 사이드에 있는 사진들

 

 

 

 

 

 

 

 

 

90계단을 내려와서 찍은 계산성당 청라언덕부터 사진찍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르신도 있고 유명하긴 한가보다 

 

 

 

계산성당을 눈 앞에 두고 사랑비 세트장이라기에 갔더니 난 사랑비 안봐서 모르겠는데,

보예가 예전 찾집이란다.

뭔소린지~~ 우선 윤아랑 장근석 사진들이 있어서 찍었다.

 

 

 

 

어?? 보예얼굴 나왔네^^;

 

 

 

 

횡단보도 건널려고 하는데, 이렇게 이상한게 있어서 무시했더니

보예가 내가 찍은 신천에서 찍은 사진 중에 있다고 한다. 보니 빛의 하모니다.

밤에 불켜진거 봐야 예쁘다고, 내가 찍은 사진은 밤에 찍은 거라 그런지 전혀 모르겠다.

 

 

 

계산성당 ---일요일이라 성당에서 찬송가가 들리고 들여다보니 사람이 많다

 

 

이상화 서상돈 고택 찾는 중에 벽에 이렇게 그림을 그린게 있어서 찍어봤다. 

 

 

아파트 사이에 있는 서상돈 고택

 

 

 

 

 

 

 

 

이상화 고택은 문이 닫겨있어서 담넘어 핸드폰 넣어 찍어봤다.

 

 

 

 

골목에 있는 사진

 

 

골목 끝에 있는 그림인데, 정말 사진같다.

 

 

 

골목을 나와 계산오거리의 도로로 나오니 이렇게 사진들이 있다.

 

 

 

 

 

 

몸은 힘들었지만 너무 좋았다.

 

버스로 지나간게 몇번이고 그 근처를 걸어다니면서도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 볼 생각을 못했는데,

한번 가봤으니 다음부턴 자주 가봐야지 싶다. 가깝기도 하지만 앞으로 커피 마실때마다 이곳이 생각날 것 같다.

커피 사와서 걸어다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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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내내 살만 디룩디룩 쪄서 운동하라는 말에 나섰는데,
신천교에서 걷기 시작해 풍경이 좋아서 블로그에 올려야 겠다. 생각이 들었다.
운동은 질색이지만 진짜 잘 만들어 놓은듯 하다...


천둥오리인가? 여하튼 요런 녀석들도 많고



운동하라고 이렇게 부추기기도 한다. 에효~~



이렇게 대구의 관광안내까지 되어 있다.
내가 안 가본 곳이 대부분이다.  --이런~~ 나 뭐했지??



요런게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건너보고 바로 되돌아 왔다.
건너편은 길이 끝까지 안 나있고 도로라 갈 수가 없어서리



돌로된 징검다리에서 찍은 사진들 요건 역광


운동을 계속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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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시간 맞추기 힘들어서 바로 횟집으로 갔는데,
셋팅이 다 되어 있어서, 먹으면서 늦은 사람들 기다리는데, ㅎㅎ 거의 다 먹어버렸다.


근데 회를 즐기지 않는데, 여기 회는 틀린가?? 입에서 녹는다 녹아^^



다들 모여서 이동을 했다. 2차는 해운대역(기차) 근처 준코에 갔는데, 안주~~~




그리고 새벽2시까지 달렸다. 3차는 준코 노래방 여기도 술마시며 노래하는데, 힘들다.


숙소(아르피나 유스호스텔)에 도착하니 새벽4시가 넘었다. 힘들어~~~~8명이라고 잡은 방


침대에 냉장고, 옷장, 화장대, TV가 있고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동으로 각 층마다 있는듯 하다



부산 사는 친구 말이 최근 며칠 계속 이렇게 흐렸다고 한다. 밤에 이 다리의 야경이 보고 싶었건만 결국 못 봤다.



건물이 신기해 찍긴 했는데, 실물이 더 나은듯...너(건물) 사진빨 안받는다.




누리마루~~~ 조깅하는 사람들과 관광온 사람들로 북적북적


최치원 동상---해운대를 이름한 유명한 인물






누리마루에서 찍은 광안대교



집으로 오는 기차표!! 예매는 필수~~예매안한 사람 입석표도 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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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라 기차표 예매는 필수!!



부산역에서 윤희씨 만나서 바로 자갈치 시장으로 GO~GO


자갈치 시장 앞 바다




구경하다가 밥을 먹기위해 돌아다니다
간단하게 먹는다고 식당에 들어가선 생선구이 小자를 시켰더니 좀 많다.


근데 완전 맛있다. 정말 입맛이 변하나 보다 생선가시 때문에 쳐다보지도 않던 생선을 먹는데,
비리지 않고 완전 진짜 완전~~ 맛있다.

밥 금방 먹고 손으로 집어서 남은 생선 모조리 배속으로 넣었다.
납작한 생선이 가자미 인가? 그거만 조금 짜고 나머진 그냥 먹어도 된다.
--손 더러워지는거 싫어서 손쓰는 음식 진짜 싫어하는데, 통닭 종류와 쌈 같은거~


BIFF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진찍는거 귀찮아서 그냥 걸으면서 호떡 사먹었는데,
이승기가 먹은 호떡이 아니다. 그래도 맛있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이 이승기 호떡먹고 느끼하다고 하던데,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그리고 국제시장을 물어서 가다가 만물의 거리가 어디냐고 물어도 가르쳐 주는데,
이 부근이 다 시장이다. 그리고 다 붙어 있다.
국제시장, 부평시장, 만물의 거리, 젊음의 거리, 미술의 거리 등등이
부산 언니는 먹자골목, 구제시장 이라고도 하는 것 같던데,,,
정말 음식만 있는 곳도 있고, 옷만 파는 곳에 액세서리,,,, 많다.

그리고 난 은 반지를 질렀다. 가격이 싼 것 같아서...
 사이즈가 없어서 주문해서 택배보내 주신단다. ㅋㅋ --기대된다.





물어물어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이젠 힘들다. 헌책방도 있지만 교재파는 곳이 많았다.
이승기가 다녀간 이후로 활성화가 많이 된줄 알았는데, 작아서 금방 돌아볼수있어서 그나마 다행...힘들었는데






자갈치 시장으로 다시 가기위해 걷는데 지하상가 입구에 미술의 거리라도 적혔길래, 호기심에 발길을 옮겼는데, 난 여기가 제일 맘에 든다. 그래서 여기 사진이 제일 많다.


한지공예, 목공예, 그림, 커튼, 액세서리 등등 직접 체험도 해 볼수 있게 해놨던데,



그리고 모임을 위해 다시 자갈치시장으로 GO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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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정리해서 11:30에 체크아웃하고 한드미마을로 갔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볼꺼 없다고 계속 가자는 말만하는 동생과 역시 탐탁찮은 오빠의 반응 때문에 바로 길을 나서야 했다.



구인사




구인사에서 차 축제를 하는데, 한 스님께서 가시면 차를 드실 수 있다고 하기에 차를 좋아하는 나와 새언니는 색다른 차를 마실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갔는데, 스님들 다 드시고 나서야 가능하단다. 10시부터 시작한 축제 우리가 축제장소에 도착했을 땐 3시였다. 5시간동안 스님들 대접했다는 건데,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인지.  그냥 내려왔다.




온달관광지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해서 온달산성은 이용시간이 지나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온달산성을 제외하고도 시간이 촉박해 정말 급하게 정신없이 구경하느라 사진을 많이 찍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온달동굴은 어두워서 사진이 잘 나오지도 않고, 온달관은 특별한게 없어서 아무것도 찍지 않았다.




드라마 세트장




온달동굴



온달동굴 밖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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