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에 도착해 갈만한 곳을 찾는다. 처음부터 즉흥적인 여행이라. 통영가기위해 출발했는데, 부산으로 가질 않나... 그러니 계획을 가면서 잡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바람의 언덕을 가는 길이었으나 거제를 찾으니 포로수용소가 나왔고, 사촌동생의 적극적인 건의에 가기로 했는데, 바람의 언덕을 먼저 갔다가는 포로수용소가 끝나는 시간이라 급하게 도착.
6시까지 하는데, 5시에 도착했다. 입장료가 어른 4,500원이기에 비싸다 싶었는데,,, 헐~~ 이렇게 넓을 줄이야.
시간은 없고, 정말 뛰다시피해서 구경을 했다. 우선 결론을 말하자면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다. 예정없이 왔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니고 계획을 하고 왔더라도 이곳의 나의 의견을 빠졌을테니... 원래 이렇게 슬픈 역사는 좋아하질 않아서...
설치배경(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거제도를 포로수용소 적합 지역으로 판단한 이유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2년 6월 9일에 열린 미 하원의 청문회이다. 이 청문회는 포로수용소장 돗드장군의 피랍사건과 관련하여 거제도 포로수용문제 전반에 걸친 사실 확인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은 육군성장관(Secretary of the Army) 페이스(Hon. Frank Pace, Jr.)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Gen. J. Lawton Collins, Chief of Staff, United States Army)이였다. 거제도를 포로수용소 장소로 선택한 주요 이유라고 두 사람이 밝힌 내용은
①(섬이기 때문에) 포로 관리에 최소의 인력과 경비가 소요될 것이다.
②급수가 용이하다.
③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장소가 있다는 점 등이었다.
특히 급수문제는 중요한 요소로서 고려되었는데, 근해에 있는 여러 섬 중에서 거제도 외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 공급이 가능한 섬을 찾기 어려웠다. 제주도에는 이미 많은 피란민이 들어차 있는데다가 그들이 사용할 물도 충분치 않아서 우물을 더 파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포로의 관리(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전쟁 전기간을 통하여 북한 및 중공군 포로에 대한 한국군 및 유엔군측의 관리 및 대우의 실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든 수용소의 위치도 공개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백색 또는 황색으로 PW표지가 되어 있어서 수용소 상공을 비행하는 항공기가 이 표지를 관측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공산군측의 포로 관리의 실상이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현상이었다.
유엔군 관할하의 모든 포로수용소들은 1949년 제네바협약의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엄격히 관리되고 있었으며, 그 실태가 국제적십자사 대표들에 의해 수시로 점검되고 있었다. 그리고 서방 언론들에 의해 언제든지 확인이 되고 지상을 통해 보도가 되었다. 전시라고 하는 악조건하에서도 유엔군측이 국제법 및 관례를 따라 포로를 관리하려고 노력한 것은 분명했다.
수용소의 질서는 포로자치제에 맡겨져 있었으므로 유엔군 수용소는 낙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장에서는 생각해볼 수도 없었던 숙사에서 하루 세끼의 식사를 제공받고, 하는 일이라고는 형식적인 작업이 고작이었다.
전장에서처럼 죽이고 죽는 전투도 없고, 발이 부르트도록 강행군을 하는 일도 없었으며 잠을 못자면서 경계근무를 설 필요도 없었다. 경비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든든하게 맡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겨울 추위가 와도 동상에 걸릴 염려가 없었다.포로수용소 내에서의 포로들의 일과는 통상 다음과 같았다.
오전 5시 30분
오전 6시 30분 전원 집합 점호
오전 7시 오전 일과 시작
오전 11시 30분 점심식사
오후 1시 작업 인원 집합, 오후 일과
오후 4시 일과 종료
오후 5시 저녁 식사
오후 8시 점호 후 취침
거제도로 옮겨진 포로문제(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부산에 있던 포로가 거제도로 옮겨옴에 따라서 포로문제도 자연히 거제도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몇 개월간은 비교적 평온했다. 이 기간은 수용소 부지 정리 및 시설의 확장, 포로 배치작업 등으로 분주한 때였다. 가끔 한국 경비병과 북한 포로 사이에 사소한 시비로 인해서 충돌이 발생하기는 했으나 큰 피해는 없었다. 이 시기에 있었던 싸움이나 저항은 집단적, 사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 감정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대부분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들이었다.
이때 쌍방이 다툼을 벌이게 되었던 원인 중의 하나는 한국군 경비병보다 북한 포로에 대한 대우가 더 좋다는 사실이었다. 포로 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는 미군 당국은 포로의 대우와 인권 존중이라는 제네바협약을 준수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그들에게 더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그래서 피복이나 급식면에서 경비병보다도 오히려 포로들이 더 낫다는 사실이 한국군 경비병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에도 포로들은 북한 인민군 군가를 부르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선동적인 연설을 하고 미국인을 격렬히 증오하는 구호를 외쳐대는 등의 저항 행동을 했다. 그와 함께 1951년 3월에 만도 여섯 번의 단식투쟁 및 연좌시위와 네 번의 자해사건이 발생했다.제네바협약은 포로의 인권을 보호하는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을 뿐, 포로들이 조직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시위를 전개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일까지 고려하지는 못했다. 이때문에 포로들의 저항 활동이 격렬해져도 그것을 저지·규제할 수 있는 규정이 없었다. 이렇게 볼 때 거제도는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의 표적이 될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로가 소요나 폭동을 일으키게 되면 제일 먼저 곤욕을 치르는 것은 한국군 경비병들이었다. 이들은 소수의 인원으로써 엄청나게 많은 포로들을 경비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군의 지휘를 받고 있어서 사실상 포로 관리에 대한 실권이 없다 는 것도 행동의 제약 요건이 되었다.경비 근무중에 한국군 경비병과 포로가 충돌해도 미군측에서는 가능하면 개입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던지, 아니면 휴전회담이 곧 시작되고 멀지 않아 전쟁이 끝날 것이므로 가만이 두면 문제 가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 포로수용소장들이 심각한 수난을 겪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6·25전쟁에서 포로수용소장직을 맡은 사람들의 심리가 위축되어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항운동의 시작(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거제도를 소요와 폭동으로 얼룩지게 했던 포로들의 단체 저항 움직임은 부산으로부터 포로를 수송하던 마지막 단계인 1951년 6월 부터 서서히 그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포로들이 새로운 수용소에 도착한 이 시기에 북한군 장교 포로들이 들어 있는 제7구역의 제72소구역에서 제일 먼저 문제가 발생했다.
6월 18일에 제72소구역에서 위생 검사와 급식 문제가 발단이 되어 포로들이 식사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켰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깡통을 두드리며 돌을 던지면서 날뛰었다. 식사 거부와 소동은 다음날 아침에도 계속되었다.
장교 포로인 그들은 인근에 있는 "모든 구역의 통제권"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수용소 당국이 그것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포로들은 식사를 치우기 위해 수용소안으로 들어간 작업반을 향해 돌을 던져서 미군 장교와 사병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 계속해서 포로들이 함성을 지르며 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으므로, 이에 대항해서 경비병들이 사격을 하였다. 사격을 받게 되자 정문으로 쇄도하던 포로들은 천막으로 되돌아갔고 결국 노래와 투석도 그쳤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3명의 포로가 죽었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렇게 해서 수용소 내부는 소요와 난투극의 마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밤에는 경비병의 순찰이 없는 것을 기회로 해서 살인, 구타 행위가 빈발하여 희생자가 속출했으나 수용소 당국은 모른 척하였다. 사법권이 없는 수용소장으로서는 증거가 분명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사소한 일로 포로들이 시위와 난동을 부리는 행동은 1951년 7월에 일어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제2군수사령부는 여름 제복으로 포로들에게 붉은 색상의 짧은 소매 상의와 짧은 바지 한 벌씩을 지급했는데, 유독 북한군 포로들은 그 색상이 일본을 의미한다 하여 입기를 거부하여 옷뭉치를 집어던지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 과정에서 경비병들의 위협사격으로 3명의 포로가 사망하였다. 또 제65수용소의 포로들과 한국군 경비병들 간에 충돌이 벌어져서 포로 3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51년 후기에 유엔군사령부가 처음으로 북한 포로 첩보원들을 체포하였는데, 그들은 포로수용소 안에서 소동과 폭동을 선동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으며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진술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이런 실정을 보고 받고 현지를 시찰한 밴플리트 장군은 포로수용소 경비병력을 더 보내도록 해서, 1951년 말에는 9,500명이나 되는 관리 요원이 거제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수용소에서 요구했던 규모보다는 6천명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경비 태세는 어느 정도 좋아졌으나 구역 내에서의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투쟁은 계속 가열되기만 했다. 어느 한 편이 상대에게 전면 항복하지 않는 한 구역 내의 패권 싸움, 예를 들면 구타, 사형(私刑), 인민재판과 이것들을 제지하거나 보복하려고 하는 폭력 행위 등은 그칠 수가 없었다. 급기야 1951년 12월 18일에는 투석전이 일어나서 14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처럼 흥분된 분위기는 포로심사 문제가 대두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그런데 이런 해방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움직인 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해방동맹을 조직하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자는 북한 공산군 전사 출신이라고 알려진 홍철인데 그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배후 인물임엔 틀림없다는 주장이 있다. 홍 외에 또 한 사람으로 이학구 총좌가 있었다. 그는 남침 당시 북한 인민군 제2군단 작전참모였고, 낙동강전선에서는 제13사단 참모장으로서 1950년 9월 21일 다부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으로 투항해 온 사람이었다. 그는 포로 중의 최고위 계급자로서 해방동맹을 조직한 실질적 인물은 아니더라도 홍철과 더불어 그 조직을 조종하는 인물임엔 틀림없었다.
어쨌든 계급이 높았던 만큼 이학구는 표면상으로는 포로의 대표 행세를 하였다. 그가 정체 불명의 인물과 더불어 전수용소의 통솔권을 장악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판문점 회담이 절정에 이르자 그는 전 거제도 수용소의 이른바 대열 강화 사업에 착수, 비밀리에 각 수용소 간의 통신망을 조직하여 각종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또 그는 수용소 당국에서 요구하는 포로 명부 작성 제출도 거부케 하고 송환 분류 심사에도 응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까지 수용소 안이 온통 친공포로들의 광란장소로 변하여도 수용소를 관리하는 미군 당국은 그냥 보고만 있는 자세였다. 수용소장은 후방기지 사령관(수용소 관할의 직속 상급 사령관)이나 또는 그 이상의 지휘 계통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지시도 받지 못하고 있어서, 그로서는 포로를 제약할 수 있는 방도가 달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고급 사령부의 이러한 무관심은 휴전이 성립되는대로 포로들을 송환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건의 초기에 신경을 써서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 사태를 악화시키는데 일조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한국군의 경비 책임자나 감시병들의 분노는 말할 수 없었지만 포로 관리에 대한 권한이 없고 경비 담당에 지나지 않아 별 도리가 없었다. 만약 한국군에 관리권이 있었다면 친공포로들이 그렇게 날뛰지 못했을 것이며, 무법천지같은 혼란 상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 한국군이나 유엔군의 포로들이 북한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유엔군 당국은 알고 있었다. 만일 유엔군측도 공산군측의 수법 그대로 친공포로를 다루었더라면, 그들이 감히 포로가 된 나라의 수용소에서 자기 나라의 기를 게양하고 자기 나라 노래를 공공연히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이러한 때, 북한측에서는 [특별공작대]라는 특수 조직체를 만들어 암약하기 시작했다. 북한군 총사령부에 소속된 이 조직체의 임무는 전선에서 자진 투항하여 포로의 신분으로 수용소에 들어가 특별 지도 사명을 수행할 공작대원을 훈련시키는 한편, 포로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 공작대는 사실상 남일에 의해 지휘되었는데, 그는 북한 공산군내 정치보위부의 책임자로서 이런 일은 그의 소관이었다. 남일은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직접 특별공작대를 편성하고 2개월에 걸쳐 각종 훈련과 교육을 시킨 다음 조직적으로 전선을 통해 수용소에 침투시켰다.
공작대 활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통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의 통신 구조는 ①각 수용소 내의 연락망, ②수용소측 지휘부에서 수용소 내의 일반 포로 및 공작대원들에게 연결되는 연락망, ③수용소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연락망의 3원적(三元的)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포로들의 통신본부는 제64포로병원 장교 병동이었다. 모든 통신 정보와 지령은 일단 장교병동에 집중되었다가 분배되었다. 외부로 보낼 통신을 가진 포로들은 환자로 가장하여 입원하였으며, 퇴원하는 환자들이 그것을 받아 각 수용소에 전달하였다.
또한 공산군 총사령부는 거제도 포로와 판문점 대표들 간의 공동 노력을 조정하기 위한 통신 방법으로서 [첩보부]와 [유격지도부]를 이용하였다. 유격지도부는 통신을 전달할 급사를 파견하였고, 첩보부는 10∼12명의 장교와 하사관으로 편성된 공작대를 내보냈다. 이 공작대는 소련제 휴대용 무전 수신기를 갖고 구역 간 통신 연락을 담당하였다. 이 두 기관은 포로들의 통신을 그들의 총사령부에 전달하는 일도 수행하였다.그러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으로 연락하는 통신은 어떠한 경로를 밟았던가? 이는 남한의 공산 간첩망을 조종하고 있는 첩보부의 비밀정보대에서 관장하였다. 이 공작대원들은 피란민으로 가장하여 수용소 부근의 민간 부락이나 피란민 부락에 잠입했다.
그들은 포로작업대가 수용소 밖으로 나오면서 약속된 장소에 투하해 놓은 통신문을 북으로 보내고, 또 같은 방법으로 북의 지령문을 포로들에게 전달하는 통신 수단을 주로 썼다.
특별공작대의 암약이 시작되자 공산측에서는 거제도 포로 전체를 지휘할 우두머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목적으로 밀파된 자가 북조선노동당의 부위원장 감투를 쓰고 있던 박상현이라는 자였다. 그는 전선에서 계획적으로 포로가 되어 1951년 11월경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들어오게 되었다.무명 전사로서 위장하여 제77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박상현은 해방동맹의 조직을 인수하여 각 수용소의 세포 조직을 재점검, 정비 확대하고 일사불란한 지휘 계통을 확립했다. 따라서 그동안 포로 대표였던 이학구는 명목상의 대표가 되고 모든 실권은 박상현에게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특별공작대와 해방동맹은 북한군 총사령부에서 내리는 지령에 의해 언제든지 행동할 수 있도록 조직의 정비를 완료했던 것이다. 이후 박상현은 수용소장 돗드 준장 납치사건 등 온갖 폭동사건을 현장에서 조종하였다. 그러나 그후 그는 이학구 등과 더불어 폭동의 주모자로서 수용소 당국에 체포되었다. 분리 수용된 그는 밀파되어 온 최후 목표가 달성되기 전에 수용소 내의 조직이 와해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북에서 받은 지령, 포로 조직, 투쟁 계획과 운영 방법, 남일의 지령 등 일체의 내용을 스스로 폭로했다. 그는 그후 또다시 변절하여 포로 송환 때 북한으로 가서 이학구와 더불어 환대를 받고 건설사단장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얼마 후 여러 가지 죄명을 뒤집어 쓴 끝에 숙청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환심사에 대한 항거폭동(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심사를 실시하지 못한 구역 중에는 제62구역이 있었다. 여기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완전히 통제를 하고 '전원이 북한으로의 귀환을 희망하고 있으므로 심사는 시간 낭비'라고 선언하면서 유엔군측 심사관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엔군측은 심사를 강행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서 실력 행사를 계획하였다. 이 구역에는 대부분 서울 출신의 의용군들이 있었으며 그중 절반이 대학 재학생으로서 사상적으로는 완전한 적색분자의 친공 수용소였다. 포로수용소 당국도 이런 형편을 알고 있었으므로 심사반은 신중한 계획을 세워 무장 병력의 특별 엄호하에 집단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구역을 4분하여 격리시키고 각 소구역별로 심사를 실시키로 하였다.
반공포로 학살사건(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1951년 8월 말까지 거제도와 부산에서는 포로들 간에도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특히 거제도는 친공포로들의 폭력 행사로 더욱 살벌해지고 있었다. 양쪽은 수용소의 각 구역 내에서 자기 편의 인원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폭력이 횡행했으며 특히 친공계열이 우세한 곳에서는 매일 인민재판이 열렸다. 비록 반공주의자들이 다수인 경우에도 친공포로들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핵심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이 잘 되고 계획된 방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친공포로들이 주도한 반공포로 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은 1951년 9월 17일에 일어난 일이다. 이날 밤 제77수용소에 있던 해방동맹 본부에서는 비밀리에 대원들을 모아놓고,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이 대공세를 취하여 부산이 벌써 북한 공산군 수중에 들어 왔으며, 그 중 선봉대로서 1개 대대가 거제도에 상륙하여 포로들을 해방시키려고 전진 중에 있다." 고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 말로 그들을 현혹시켰다. 그리고 거제도에 상륙할 그 선봉부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투쟁 실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와 같은 지령과 선전 선동은 즉각적으로 모든 친공포로들을 자극함으로써 그중 일부는 미치광이가 되어 수용소마다 반공포로들을 찾아내어 운동장으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형식적인 소위 인민재판을 한 후 즉석에서 타살하였다. 각 수용소에서는 10명 내지 30명씩의 반공포로들이 무참하게 학살 당함으로써 전 수용소에서 희생된 숫자는 300명에 달했다.
9·17사건이라 불리는 이 폭동은 9월 20일까지 계속되어 각수용소에는 인공기가 나부끼고 거제도가 마치 공산군의 병영이라도 된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다만 우익계가 장악한 포로수용소에서는 이와 같은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좌익계가 열세하여 폭동을 일으키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이 사건은 좌익 친공포로들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 반대로 우익 반공포로들에게는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더욱 공고한 단결을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도 포로수용소 당국은 종전과 다름없이 철조망 밖에서 감시만 할 뿐이었다. 특히 밤에는 친공포로들이 천막 안에서 반공포로를 상대로 사형(私刑)을 가하거나 살해를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살해를 할 때도 특급이라 하여 돌로 머리를 쪼아서 타살하고, 1급은 곤봉 500대, 2급은 400대, 3급은 300대를 치는데 대개 30대 정도에서 절명하였다고 한다. 시체는 솜으로 입을 틀어 막은 다음 변소 또는 수용소내 땅에 매장하거나 때로는 철조망밖에 버리기도 했다.
이런 중에서도 그해 12월 23일 밤에 제73구역에서는 150명의 친공포로들이 성탄절 축하 준비를 하고 있던 반공포로 60명을 습격, 난타하여 한 명이 죽고, 32명이 중경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수용소 내에서의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세력 다툼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으며, 언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는 긴장된 날들이 계속되었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격돌(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http://www.pow.or.kr)
1952년초 친공포로의 송환 분류 심사 거부로 일어난 2.18 폭동이 진압되고 나서도 각 친공 수용소에서는 밤마다 반공포로들이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타살되고 있었다.이 해 3월 16일 오후에는 친공포로 일색인 제95구역에서 약 50명의 반공포로들이 결사적으로 탈출하여 철조망 쪽으로 달려 나왔다.
친공포로들은 이들을 향하여 돌을 던졌다. 사지를 탈출하려는 포로들을 국군 감시병들이 보호했고, 수용소 소장 돗드 준장이 현장에 나타났다. 소장의 명령으로 수용소 정문이 열리자 사지를 빠져나온 반공포로들은 수용소장에게 제92, 95구역의 수용소를 해산시키고 우익계 포로들을 구출하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95수용소 안에는 우리와 같은 동지들이 많이 있는데 오늘 중으로 나오지 못하면 다 죽게 된다. 나오다가 잡힌 사람도 많이 있다. 그리고 놈들은 사람을 죽여서 그 피로 깃발을 만든다. 저 지붕 위에 있는 인공기를 봐라."
95수용소에 걸려 있는 깃발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물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육안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빛깔은 자색으로 변색되었고, 기폭이 뻣뻣해져서 바람에 잘 나부끼지도 않았다.
반공포로들의 탈출을 목도한 반공청년단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다음 날인 17일에 반공 총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 이를 우익계 수용소인 제71, 72, 73, 74. 81, 82, 83, 84, 91, 93, 94, 96 등 각 구역에 통보했다. 반공 총궐기대회는 비폭력으로 각 수용소 안에 태극기를 걸고 각종 구호를 외치며 인접해 있는 좌익계 수용소를 위압한다는 단조로운 시위였다. 그리고 제93구역에서는 제92, 95구역 등 좌익계 수용소에 대하여도 적극적인 시위를 하기 위해 국군 제33경비대대 소속인 제5중대장의 협조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17일 아침 각 수용소에서는 하늘 높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목이 터지도록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기세를 올렸다. 오후에는 계획대로 제93구역을 비롯한 제91, 94, 96구역에서 반공 시위를 감행했는데 이 때에는 제5경비중대장 강대위가 지휘하는 소대병력이 이들을 엄호하고 있었다.시위 행진부대는 친공 제92구역 앞길을 지나면서 구호를 제창했다. 이 때 제92구역에서는 시위부대에 대해 투석공격을 시작했다. 시위부대는 많은 인원이 부상을 입었으나 대항은 하지 않고 그대로 전진하였다. 그러다가 참다못한 강대위가 권총을 뽑아 사격 신호를 내렸다. 사방의 국군 감시대에서는 일제히 공중에다 위협사격을 가했다. 그래도 친공포로들은 계속 돌을 던졌다. 총성 때문에 미군 감시병들까지 출동했으나 그들은 가세하지 않았다. 총에는 당할 수 없었던지 친공포로들의 투석이 줄어들어 멈추자 사격도 멈췄다. 우익 시위부대들은 부상자들을 수습하여 각 수용소로 돌아갔다. 수용소 내로 들어가서도 밤새도록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는 전체 우익 수용소에서 반공 총궐기대회의 명목 아래 18일에도 계속되었다.
17일의 충돌로 친공 제92구역소의 희생자는 30여명 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병원으로 실려갈 정도의 중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이 경비대에게. 사격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주고 도전을 가해. 왔으므로 지금껏 참아온 울분을 응징한 것이라고. 우익계 포로들은 생각하였다. 이런 시위는. 29일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좌익계 수용소인 제76, 77, 78구역에서도. 우익과 맞서서 또다른 시위를 벌이고, 수용소. 벽과 철조망에 삐라와 플래카드를 게시하였다.. 양쪽이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포로들의 시위로 좌우익간의 충돌이 우려되자 한·미경비대는 비상 경계에 들어갔다. 이때 제77구역 내에는 우익계 포로 약 160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탈출 포로의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미군 당국은 한발짝도 수용소 안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분명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제95구역은 이후에도 악질 친공포로의 소굴로서 포로수용소 당국도 접근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한국군 경비대와도 충돌을 일으켰다. 이 구역은 국군 제33경비대대 제5중대 경비구역이었는데, 1952년 4월 10일에도 경비병과 포로들 간의 욕설이 빌미가 되어 가벼운 총격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한·미 경비병과 포로들 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한국군 경비대측에서는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미군 대위 1명이 부상을 입는 결과를 빚었다. 포로측은 30명이 피살되고 80명이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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